“주막은 왜 찾으세요. 어느 새 망령이 나셨남.”

하고 영신은 동혁을 붙잡아 앉히고는 홑이불을 새로 시친 저의 이부자리를 펴 주고 나서,

“하고 싶은 얘긴 태산 같지만, 오늘은 일찌감치 주무세요. 오죽 고단하실까.”

하고 일어선다.

“아닌게 아니라, 내쫓아도 못 가겠쇠다.”

하고 못 이기는 체하고 자리 위에 쓰러졌다. 영신은 안방으로 건너갔다. 자리끼를 들고 들어와서,

“문고리를 꼭 걸고 주무세요. 네!”

하고 의미 깊은 웃음을 웃어 보이고는 나간다. 동혁이도 한곡리 바닷가의 오막살이에서 영신이가 오던 날 밤에 제가 한 말이 생각이 나서, 빙긋이 웃으며,

“굿 나잇!”

하고 손을 들었다. 조금 있자, 문풍지가 진동하도록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소리가 안방에서 잠을 얼핏 이루지 못한 영신의 귀에까지 들렸다.

동혁은 한곡리서 나팔을 부는 시간에 자리를 걷어차며 벌떡 일어났다. 정신없이 쓰러져 잤건만, 온몸의 피곤이 회복되지를 못해서 사지가 나른한데, 잠이 깨어 누웠자니 비록 깨끗하게 빨아서 시치기는 했으나 영신이가 베던 베개와 덮던 이불에서 어렴폿이 풍기는 여자의 살 냄새는 코를 자극시킬 뿐이 아니었다.

그는 대문 밖으로 뛰어 나가 체조를 한바탕하고 샘을 찾아가서 냉수로 세수를 하고는, 학원으로 올라가서 두어 바퀴 돌면서 야릇한 흥분을 간신히 가라 앉혔다. 늦은 가을 서리 찬 아침은 정신이 번쩍 나도록 상쾌하다.

'아하, 여기가 청석골이었구나!'

하고 동혁은 산중 벽촌의, 하나도 신기할 것이 없는 자연을 둘러보았다. 띄엄띄엄 선 초가집 앞의 고욤나무는 단풍이 지고, 미류나무는 벌써 낙엽이 져 가지만 앙상한 것이 매우 소조해 보인다. 다만 흰 벽이 찌들은 예배당만이 한곡리에 없는 귀물이었다.

…조반을 먹으면서도 두 사람은 보통 연애를 하는 남녀와 같이, 깨가 쏟아지는 듯한 이야기는 없었다. 영신이도 수다스러이 재잘대기를 좋아하는 성미가 아니나, 하고 싶은 말은 가슴속에 첩첩이 쌓였건만 입은 나분나분하게 놀려지지를 않았다.

“이따가 내빈 총대(來賓總代)로 한 마디 해 주세요. 기부금 적은 사람들이 감동이 돼서 척척 내놓게요.”

하고 특청을 하였고,

“어디 연설 말씀을 할 줄 알아야지요.”

한 것이 중요한 대화였다.

시간이 되려면 멀었건만 아이들은 거의 다 모여들었다. 그 중에도 계집애들은 명절 때처럼 울긋불긋하게 입고 어깨동무를 하고는 학원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어떤 계집애는 추석놀이를 하던 날 밤에 꽂았던 풀이 죽은 리본을 꽂고 자랑스러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닌다.

동혁은 운동장으로 내려가서 나비를 움켜잡듯이 제일 조그만 계집애 하나를 붙들어 번쩍 들고 겁이 나서 빨개진 뺨에 입을 맞추고는,

“이 색시 몇 살인가?”

“집은 어디지?”

“그래 채 선생님이 좋아?”

하고 말을 시킨다. 다른 아이들은 고만 꼬리가 빠질 듯이 풍지박산을 하는데 동혁이에게 붙들린 계집애는 처음에는 겁이 나서 발발 떨며 울지도 못하다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아닌 줄 알고,

“일굽 살유.”

“우리 집은 청석굴이에유.”

하고 사투리를 써가며 곧잘 말대답을 한다.

동혁이는 체격과는 정반대로 아이들을 보면 귀여워서 사족을 못쓴다.

“이걸 누가 해 주든?”

하고 리본도 만져 보고, 어깨 위에다 둘씩이나 올려놓고 얼싸둥둥을 하며 춤을 추듯 하고 다니는 것을 보고는 '어디서 저렇게 생긴 사람이 왔을까?' 하고 도망을 갔던 아이들이 살금살금 모여들어서 동혁을 에워쌌다.

“저어 이 아저씨가 사는 한곡리란 동네엔 너희 같은 애들이 창가도 썩 잘하고 유희도 썩 잘하는데, 너희들은 아주 바보로구나.”


하고는, 저 먼저 굵다란 목소리로 동요도 하고, 그 큰 몸집을 굼뜨게 움직이며 유희하는 흉내도 내어 보인다. 아이들은 그것이 우스워서 깔깔거리며 자지러지게 웃다가,

“애개개, 우리더러 창가를 할 줄 모른대여.”

하고 도리어 놀려먹으려 든다. 동혁이가,

“그럼 어디 한번들 해봐.”

하고 꾀송꾀송하던 아이들은 성벽이 나서 추석날 하던 유희와 창가를 되풀이하느라고 시간이 된 줄도 몰랐다.

땡그렁 땡때앵 - 땡그렁 땡때앵 -

언덕 위 학원 정문에 달린 종이 울린다. 그 명랑한 종소리는 맑고 푸르게 개인 아침 한없이 높은 하늘로 퍼지는데, 아이들은 와 소리를 지르며 앞을 다투며 달려간다.

땡그렁 땡때앵 - 땡그렁 땡때앵 -

그 종은 새로 사다가 한 번도 울려 보지 않았던 것이다. 동혁은 머리를 들어 종을 치고 선 영신을 쳐다보았다.

“이 돈은 꼭 저금을 해 두었다가 새로 지으려는 학원 마당 앞에 종을 사서 달겠습니다. 아침 저녁 내 손으로 울리는 그 종소리는, 나의 가슴뿐 아니라 이곳 주민들의 혼곤히 든 잠을 깨워주고 청석골의 산천초목까지 울리겠지요.”

라고 씌었던 편지 사연이 생각났다. 오늘 아침의 그 종소리는 누구보다도 동혁의 가슴 한복판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