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생에 연분이 단단히 닿나 보다. 오늘 이런 일이 있을걸 미리 알고 누가 불러댄 것 같으니'

하고 미신 비슷한 운명론자가 되어 보기도 하였다.

자동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또 기차를 기다려 타고 날이 어둑어둑할 때에야 읍에 도착하였다. 정류장에서 환자는 인력거를 태우고 삼마장이나 되는 언덕길을 원재와 둘이서 뒤를 밀어주며 병원을 찾아 올라갔다. 자혜의원은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문이 굳게 닫혀서 다시 개인 병원으로 찾아갔다. 두 사람이 점심 저녁을 굶어서 몹시 시장할 것을 생각하고, 영신은,

“어디서든지 요기를 좀 하세요 네?”

하고 몇번이나 돌아다보며 간청을 하는 것을,

“걱정 마슈! 하루쯤 굶어서 죽을라구요.”

하면서도 동혁은 고기 굽는 냄새가 나는 음식점 앞에서는 외면을 하고 숨을 들이쉬지 않고 걸었다.

속옷에 땀이 흠씬 배도록 인력거를 몰아왔건만 병원 문은 걸렸다. 초인종을 한참이나 누르니까 그제야 간호부가 나와서 분을 하얗게 바른 얼굴을 내밀더니,

“선생님, 안 계세요. 연회에 가셨어요.”

하고 슬리퍼를 짤짤 끌고 들어가 버린다.

“여보, 시각을 다투는 환자가 있는데 연회가 다 뭐요?”

동혁의 호령을 듣고서야 간호부는 요리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의사는 한 삼십분 뒤에야 인력거로 달려왔다. 진찰실에 전등은 환하게 켜졌다. 나이 사십 남짓한 의사는 술 냄새를 제하느라고 가오루를 깨물며 끈끈이로 붙여 놓은 것처럼 어여쁜 수염을 배비작 거리고 앉아서 동혁에게 대강 경과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짐작하겠소이다.”

하고 영신을 눕히고 자세히 진찰을 해 본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요. 노형 말씀대로 급성맹장염인데, 밤에는 설비 관계로 할 수 없으니 내일 아침에 수술을 합시다. 우선 진통제나 한 대 놔 드릴께 절대로 안위를 시키시오.”

하고 영신의 팔을 걷어 주사를 놓고는,

“요행으로 맹장염인 줄 알아서, 일찌감치 서둘렀으니까 수술만 하면 고만이지만, 이 분은 몸 전체의 각 기관이 여간 쇠약하지가 않은 걸요. 첫째 영양이 대단히 부족한 것 같은데, 너무 무리하게 노동을 한 게 맹장염까지 일으킨 원인이 됐나 보외다.”

하고 일어서서 손을 씻는다. 동혁은 비로소 안심을 하고,

“아뭏든, 선생님께서 생명 하나를 맡아줍시요.”

하니까,

“네, 염려 마시오.”

하고 간호부더러 인력거를 부르라고 명령한다. 다시 연회로 가려는 눈치다.

동혁과 원재는, 주사 기운에 말도 못하는 영신의 어깨를 부축해서 병실로 데려다가 눕혔다.

자궁을 수술하였다는 환자가 옆방에서 신음하는 소리에 동혁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원재와 둘이서 영신의 침대 밑에 담요 한 자락을 깔고 누웠는데, 삼백 리나 걸은 노독도 채 풀리기 전에 종일 굶고 꺼둘려와서,

'눈을 좀 붙였다가 일찍 일어나야 할 텐데…'

하고 억지로 잠을 청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바짝 쓰이는데다가 창자가 달라붙도록 속이 비어서, 잠은 올 듯하면서도 안 와 주었다. 원재도 춥고 시장 한 듯, 사타구니에다가 두 손을 찌르고 새우처럼 꼬부리고 누워서, 잠을 못 자는 것이 여간 가엾지가 않다.


영신이가 잠꼬대하듯 무어라고 혼잣말을 하는 소리에 동혁은 벌떡 일어났다.


“왜 그러세요? 나 여깄에요?”

하고 희미한 전등불빛에 환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영신은 주사 기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듯 눈을 반쯤 뜨고,

“뭘 잡수세요. 원재도…”

하면서 어서 다녀오라고 손짓을 한다.

“난 괜찮아요. 우리 걱정은 하지 마세요.”

하면서도 동혁은 원재 때문에 더 고집을 세울 수가 없어서,

“여보, 일어나우. 일어나.”

하고 원재의 어깨를 흔들었다.

길거리 목노집에서 술국에 밥 한 덩어리씩을 사먹고 들어오는 걸 보고 영신은 가냘픈 웃음을 띠우며,

“근처에 음식집이 있어요?”

하고 반겨 준다. 원재가,

“선생님 시장하셔서 어떡허나요?”

하고 혼자 먹고 들어온 것을 미안쩍게 여기니까,

“시장한 게 뭐요. 일부러 굶기도 하는데.”

하고 동혁은 침대에 반쯤 걸터앉아서 영신의 손을 잡았다. 흐트러진 머리를 쓰다듬어 올리며,

“안심하고 잠을 청하시지요. 나도 눈을 붙여 볼테니…가을 밤이라 꽤 지루한데요.”

하고 위로해 준다.

영신은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창밖에 귀뚜라미 소리를 꿈속처럼 듣고 있다가, 처량스러이 동혁을 쳐다보며,

“동혁씨 난 지금 죽어도 행복해요!”

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끌어당긴다.

“천만에, 죽다니요. 우리 둘이 이렇게 떠나지 않구 오래 오래 살면 더 행복하지 않겠어요?”

동혁은 사랑하는 사람의 여윈 뺨과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영신은 눈을 내리감고 뜨거운 키스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