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이 우리 영신이!”

하고 반색을 하며 마당의 아침볕을 받으며 내닫는 어머니의 눈물이 글썽글썽해진 얼굴은 지난봄에 보았을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영신은 어머니가 반가운 것보다도 정근에게 속은 것이 몹시 불쾌해서 어머니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며 바스켓을 마루 끝에다 내던지고는,

“난 어머니가 돌아가신 줄 알았구료!”

하고, 저의 뒤를 따라와서 구두끈을 끄르는 정근을 돌아다보고 흘겼다.

“어미래 숨으 몬다구나 해야 집에 오지비…”

딸의 성미를 잘 아는 어머니는 눈 하나를 찌끗하고 심상치 않은 영신의 기색을 살피면서,

“어서 구들루 들어가자야.”

하고 어름어름한다.

“자네도 들어오랑이.”

어머니는 정근이가 정말 사위나 되는 듯이 불러 들였다. 정근이가 슬금슬금 곁눈으로 저의 눈치를 보며 들어와 웃목에 가 앉는 것을 보자, 영신은 발딱 일어서고 싶도록 불쾌해졌다. 양회 부대로 바른 장판만 들여다보고 입을 꼭 다물고 있으니까, 어머니는,

“어찌 저래 실룩해 썼소? 너 몇 해 만에 집에 온 줄 아능야? 그러다간 과연 에미래 죽어두 모르지 앙켕이.”

하고 흥분한 딸의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요모조모 뜯어보다가,

“앙이 어째 저러구 앉았기만 하오?”

하고 정근이더러 무슨 말이라도 꺼내라고 재촉 비슷이 한다. 그래도 정근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넥타이만 만지작거리고 앉았는데 영신은 무릎을 세우며,

“어머니가 저렇게 정정하신데 전보를 친 사람이 누구야요?”

하고 반쯤은 정근을 향해서 새되게 쏘아붙인다. 속고 온 것보다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나 보아 애절 초절을 하던 것이 몹시 분하였다. 그보다도 어머니를 살살 꾀이고 어수룩한 늙은이와 짬짜미를 해가지고 거짓말 전보를 친 정근의 비열한 태도가 주먹으로 그 핏기 없는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도록 밉살스러웠다.

“그거사 차차루 알지비. 아척이나 먹으면서 천청이 얘기하지비.”

하고 어머니는 부엌으로 내려가서 수산조합에 다니는 동생의 댁과 아침상을 차린다.

조금 있자 생선 굽는 냄새가 풍겨 들어오건만, 방안의 두 사람은 피차에 쓰디쓴 얼굴을 하고, 말은커녕 마주 쳐다보지도 않는다. 밤새도록 기차 속에서 시달리면서 불안과 초조에 지지리 졸아붙은 듯하던 영신의 신경은 다시금 불쾌한 흥분으로 옥죄어드는 것 같다.

정근은 양복 앞자락의 먼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튀기고 있다가,

“너무 불쾌하게 생각은 마세요. 전보는 어머니가 치라고 하셔서 치긴 내가 쳤지만…”

하고 간신히 한 마디를 꺼낸다.

“알았어요!”

영신의 대답은 얼음같이 차다.

“지난봄의 그 편지 한 장으로는…”

“단념을 할 수 없었단 말씀이죠?”


“네…”

“그래서 어머니를 꼬드겨서 말짱한 노인이 돌아가신다고 거짓말 전보를 쳤군요?”

영신의 눈초리는 마주 쳐다보기 매섭도록 날카롭다. 방안의 공기는 찢어질 듯이 빡빡한데, 어머니는 손수 딸의 아침상을 들고 들어왔다.

밥상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영신은 발딱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세수를 하고 들어왔다. 잠시 자리도 피할 겸 머리를 식히기 위함이었다.

오래간만에 모녀가 겸상을 하고, 정근은 산지기 모양으로 웃목에 가 외상을 받았다. 영신은 어머니가 그 동안 지낸 일과 수다스레 늘어놓는 잔사설을 귀 밖으로 흘리며 입맛이 깔깔해서 밥은 두어번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물러앉았다. 어머니는 정근이가 너를 불러내린 것이 아니라는 발뺌을 뿌옇게 하고는,

“여러 말 할 것 없당이. 이번에사 귀정으 내야지 어찌겠능야. 앙이 몇몇해르 두구서리 너만 고대한 사람으로 무쉴에 마다능야. 그건 죄 앙이 되갠? 난 이젠 저 사람이 안심치 않아 못 보겠다.”

하고는 연방 딸의 눈치를 살핀다. 영신은 속아서 내려온 분도 채 꺼지지 않았는데, 들어단짝 그런 말을 꺼내는 어머니의 태도가 뚜장이만큼이나 비열한 것 같아서 입술만 지그시 깨물고 있다가 '직접으로 단판을 하고 말리라'하고 입 속으로 양치질을 하고 있는 정근의 편쪽으로 반쯤 돌아앉았다.

“날 좀 보세요!”

여자의 말에 따라 정근은 뇌란 얼굴을 쳐들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다시 무릎 위로 떨어졌다.

“아뭏든 위조 전보까지 쳐서 날 불러내리신 건 비겁한 행동이야요. 더군다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줄 알고 속고 온 게 몹시 불쾌하지만 될 수 있는 대로 냉정하게 얘길하겠어요.”

하고 헛기침을 해서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원체 사랑이라는 건요, 한편 쪽에서 강제할 수는 없는 거구요, 또는 상대자의 사정을 봐서 제 몸을 바칠 수도 없는 줄 알아요. 그건 동정이지 진정한 사랑은 아니니까요.”

하고 설교를 시작하듯 한다. 정근은 그제야 영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만큼 용기를 내었다.

“나도 그만 걸 모르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단단히 믿어 오던 터에, 편지 한 장으로야 첫 번 사랑하던 사람을 단념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집에선 결혼 문제로 너무나 귀찮게 구니까, 좌우간 결정을 내려고 일테면 비상수단을 쓴 겐데…”

하고는 바늘방석에나 앉은 것처럼 불안해한다.

영신은 남자의 앞으로 조금 몸을 다그며 눈을 아래로 깔고,

“나 역시 정근씨한테 미안한 생각이 없진 않아요.”

하고 진심으로 동정하는 빛을 보이더니,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첨부터 나빴어요. 당자의 장래는 어떻게 될는지 모르고 부모들이 덮어놓고 혼인을 정했다는 건, 다시 비판할 여지도 없지만 개성에 눈을 뜬 우리가 옛날 어른들의 약속을 지켜야만 할 의무는 손톱 끝만큼도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하고 억지로 평화스러운 얼굴빛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