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가 끝나자, 원재 어머니는 회원들을 대표해서 먹 글씨로 커다랗게 쓴 백지를 무대 정면에다가 붙이고 내려간다.

'一金 貳百七拾圓也 靑石洞 婦人親睦契員 一同(일금 이백 칠십 원. 청석동 부인친목계원 일동)'

이 종이쪽을 보고 놀란 것은 비단 학부형뿐이 아니다. 이때까지 여러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않던 영신이도 무대 뒤에서 제 눈을 의심할 만큼 놀라서,

“저게 웬일이야요?”

하고 한달음에 원재 어머니의 곁으로 갔다.

“아까 회원들이 다 모인 김에, 우리가 입때꺼정 저금한 걸 새집 짓는 데 죄다 내놓기로 했어요.”

한다. 영신은 감격에 겨워 눈을 딱 감고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섰다. 영신의 덕택으로 호미와 절굿공이와 오줌동이밖에 모르고 지내던 자기네부터 글눈을 떴거니와, 오늘 저녁에 자기네가 금지옥엽같이 기르는 자녀들이 그처럼 신통하게 재주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평생 처음으로 크나큰 감동을 받은 그들은,

'오냐, 우리네 자녀도 가르치면 된다. 남부럽지 않게 개화를 한다'

하는 신념을 얻었다. 그래서 원재 어머니의 발설로 몇몇 해를 두고 별별 고생을 다해 가며 푼푼이 모은 저금을 한 사람의 반대도 없이 송두리째 학원을 짓는 데 기부를 하게 된 것이다.

“허허, 이거 부인네들이 저 어려운 돈을 내놨는데, 사내 코빼기라구 가만 있을 수 있나.”

하고 늙은이들은 주머니 털음을 하고 타동 사람까지도 지갑을 뒤져서 당장에 칠 원 각수가 모였다. 몇백 명 틈에서 단돈 칠 원! 그러나 그네들이 시재 가진 돈이라고는 그밖에 없었다. 그것도 뜻밖의 큰 돈인 것이다. 구경꾼들은 '좀더 구경할 게 없나' 하고 서운한 듯이 떠날 줄 모르다가 하나씩 둘씩 흩어졌다. 영신은 아이들의 옷과 유희하던 제구를 챙겨넣은 뒤에, 어젯밤 늦도록 빚은 송편과 시루떡을 아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아, 저이들두 이제는 저 만큼이나 깨어가는구나'하니, 저의 헌신적 노력이 갚아지는 듯, 다시금 감격에 겨워 몇 번이나 그 떡이 목에 넘어가지를 않았다.

일년 중에도 가장 밝고 맑고 서늘한 추석날 저녁의 달빛은 예배당 마당으로 쏟아져 내린다. 영신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그 달이 기울도록, 노래를 부르며 어린애와 같이 뛰놀았다. 기쁨과 행복이 온몸에 넘쳐서,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 보이기만 하면 와락 달려들어 한바탕 머리를 꺼둘러주고 싶었다. 뺨을 대고 그 기쁨을, 그 행복을 들비벼 주고 싶었다.

영신은 그 돈 이백 칠십 원 중에서 반만 학원을 짓는데 쓰리라 하였다. 그 돈을 다 들인대도 도저히 설계한 대로 지을 수 없지만 근근자자히 모은 근로계의 돈을 내놓았기로, 냉큼 송두리째 집어 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우선 이것만 가지고 시작을 해 보겠어요. 시작이 반이라는데, 설마 중간에 못 짓게야 될라구요. 기부금 적은 것만 들어오면…”

하고 회원들의 특별한 호의라느니보다 일종의 희생적인 기부금을 굳이 반만 쓰겠다고 사퇴를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아무리 같은 통속이래두 잔약한 그네들에게만 의뢰를 하는 것은 근본 취지에 어그러진다. 내 힘으로 해야지. 내 힘껏 해 보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더래두 전수히 남의 도움만 받으려는 것은 우리네의 큰 결점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자, 이젠 집을 짓는구나!'

하니, 그는 미리부터 흥분이 되어서 잠이 안 왔다. 어떻게 무엇부터 시작을 해야 할는지 엄두가 나지를 않아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교회에 관계하는 사람도 집 짓는 데는 모두들 문외한이라, 누구와 의논조차 해볼 데가 없다.

'동혁씨나 핑계김에 공사감독으로 불러 댈까? 한 번 집을 지어 본 경험이 있으니…'하다가, '아니다. 그건 공상이다'하고 어떻게든지 한곡리 회관보다 번듯하게 지어놓은 뒤에, 낙성식을 할 때에나 버젓이 초대를 하리라 하였다. 그때까지는 아무리 만나고 싶어도 꽁꽁 참으리라 하였다.

동네에 지위 명색이 두어 사람 있기는 하지만 닭의 장, 돼지우리나 고작해야 토담집이나 얽어 본 구벽다리뿐이다. 영신은 생각다 못해서 삼십 리 길을 걸어서 장터로 목수를 부르러 갔다. 재목은 마침 근동에서 발매를 하는 사람이 있다니까, 생목을 잡아 쓸 셈만 치고, 우선 안목이 있는 목수를 불러다가 의논이라도 해볼 심산이었다.

영신은 수소문을 해서 면역소나 주재소 같은 관청 일을 도급으로 맡아 지었다는 젊은 목수 한 사람을 찾아보고는 무작정하고 데리고 왔다. 데리고 와서는

“여보, 피차에 젊은 터이니, 품삯 생각만 하지 말구, 우리 모험을 한 번 합시다요. 우리 둘이서 이 학원 집을 짓는 셈만 치고 시작을 해서, 성공만 하면 당신의 이름도 나고, 큰 공익사업을 하는게 아니겠소?”

하고 학원을 시급히 지어야 할 사정과 돈이 당장에는 백여 원밖에 없다는 것을 툭 털어놓고 이야기를 한 후, 서랍 속에서 여러가지로 그려 본 설계도를 꺼내어 보였다. 설계도를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앉았던 서글서글하게 생긴 목수는,

“그러십시다. 제 힘껏은 해 봅죠. 돈 바라구 하는 일도 있구, 일 재미로 하는 일도 있으니깐입쇼.”

하고 선뜻 대답을 하였다. 바다 밖으로까지 바람을 잡으러 다녀서 속이 터진 목수는, 영신의 활발한 첫 인상도 좋았거니와 자기의 사사로운 일이 아닌데, 물정을 모르는 신여성이 삼십 리 밖으로 저를 데리러 온 열성에 감복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삐를 걸치고 짜개발을 하고는, 남의 지청구만 받으며 따라다니던 사람이라, 처음으로 도편수가 되어서 제 의사껏 일을 해 보게 되는데, 미리부터 어깨바람이 났던 것이다.

재목도 우거지 같은 떼를 써서 헐값으로 잡아서 실려오고, 벽련하는 꾼에 자귀질, 톱질꾼까지 불러다가는 엉터리로 일을 시작하였다.

집터는 온 동리가 내려다보이는 예배당 맞은쪽 언덕에다가 잡았다. 어느 교인의 소유로 삼백여 평이나 되는 것을 '돈이나 땅을 많이 가진 부자가 천당에 들어가기는,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도 어렵다'고 예수가 말한 비유까지 해가면서 사뭇 강제로 빼앗다시피 하였다.

집터를 닦는 날은 한곡리만큼 풍성하지는 못하였다. 인심도 다르거니와 한창 벼를 베고 한편으로는 바심을 하기 시작한 때라 장정은 얻어 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영신은 청년회원과 아이들까지 총동원을 시켰다.

'체면이구 뭐구 볼 때가 아니다!'하고 그는 다리를 걷고 버선까지 벗어던지고 덤벼들었다. 주춧돌을 메고 목도질을 해 오려면 어깨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이 아팠다. 키동갑이나 되는 거성(큰톱)을 당겨주고 껍데기도 안 벗긴 물먹은 기둥나무를 이리저리 옮기고 하느라고, 해뜰 때부터 어둑어둑할 때까지 봉죽을 들어 주고 나면 허리가 참나무 장작이나 댄 것처럼 꼿꼿하고 뼈끝마다 쏙쏙 쑤셔서 그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다.

“저러다 큰 병이 나면 어떡허시료?”

하고 부인네들은 쫓아다니며 한사코 말리건만, 영신이 자신부터 그런 일까지 나서서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어정버정하고 일들을 안한다. 또는 모군꾼 한 사람의 품삯이라도 절약을 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달밤을 이용해서 영신은 모래를 날랐다. 들것을 만들어 가지고 청년들과 마주잡이를 해서, 시냇가의 모래와 자갈을 밤늦도록 나르기를 여러 날이나 하였다.

한창 기운의 남자도 힘이 드는 일을 하다가 몹시 피곤하면 시냇가 모래밭에 두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서 지쳐서 늘어진 다리 팔을 제 손으로 주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