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두 사람의 평생을 두고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무한히 정다운 추억이었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은 불시에 몸과 마음이 더한층 가까와지는 것이 느껴졌다. 동혁은 더 우기지 않았다. 남자의 자존심으로서가 아니라, 그런 말을 강제로 시키기가 가엾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럼 이번만은 내가 지지요.”

하고 동혁은, 한참이나 뜸을 들이더니,

“어째서 그런지 몰라두, 내가 영신씨한테 하고 싶은 말이나 영신씨가 나한테 꼭 하고 싶다고 별르면서도 얼핏 입밖에 내지를 못하는 말은 그 내용이 비슷한 것 같은데…영신씨 생각은 어떠세요?”

“…”

“아아니, 말대답이나 시원스럽게 해 주셔야지요.”

하고 동혁은 달려들기라도 할 형세를 보인다. 영신은 간신히 알아들을 만한 목소리로,

“저 역시도 한평생에 제일 중요한… 우리의 운명이 좌우되는 그런…”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떠듬떠듬 토막을 친다.

아무리 고집이 세고, 무슨 일에나 앞장을 서고 누구에게나 지지 않으려는 성벽이 대단한 영신이언만, 오늘 저녁 이 자리에서만은 꽃을 부끄리는 처녀의 속탈을 벗지 못한다.

“아마 연애나 결혼 문제루 퍽 고민을 하시는 중이시지요?”

동혁이가 불쑥 내미는 말이 정통으로 들어가 맞히니까,

“…”

무언 중에서 영신의 온몸의 신경은 불에나 닿은 것처럼 옴찔하고 자지러들었다.

“나도 그런 문제로 적지 아니 괴롭게 지내는 중이에요. 늙으신 부모의 성화가 매일 같아서 그것도 어렵지만, 사실은 나 자신이 몹시 외로울 때가 있어요. 억지로 일을 해서 잊어버리려고는 애를 써도 나만큼 건강한 남자가, 언제까지나 독신으로 지낸다는건 암만 생각해두 부자연한 것 같아서…”

하고 발꿈치로 조약돌을 비벼서 으깨며 말을 멈추고는, 영신을 흘깃 곁눈으로 흘려본다. 영신은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다가 글씨를 썼다 지웠다 한다.

“영신씨!”

동혁은 새삼스러이 저력 있는 목소리로, 숨쉬는 소리가 서로 들릴 만큼이나 가까이 앉은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네?”

영신은 하얀 이마를 들었다.

“멀고도 가까운 게 뭘까요?”

끝도 밑도 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말에 영신의 눈은 동그래졌다.

무어라고 대답을 하면 좋을지 몰라서 눈을 깜박깜박하더니,

“글쎄요…사람과 사람의 사일까요?”

하고 동혁의 표정을 살핀다.

“알 듯하고도 모르는 건요?”

“아마…남자의 맘일 걸요.”

그 말 한 마디는 서슴지 않는다.

“아니, 난 여자의 맘인 줄 아는데요.”

동혁의 커다란 눈동자는 영신의 가슴속을 뚫고 들여다보는 듯하다.

달은 등뒤의 산마루를 타고 넘으려 하고 바람은 영신의 옷깃을 가벼이 날리는데 어느덧 밀물은 두 사람의 눈 앞까지 밀려 들어와 날름날름 모래 바닥을 핥는다.

“……”

“……”

굴 껍데기로 하얗게 더께가 앉은 바위에 찰싹찰싹 부딪치는 파도소리뿐…온 누리는 아담과 이브가 사랑을 속삭이던 태고적의 삼림 속같은 적막에 잠겨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형체 없는 영혼만은 무언중에도 가만히 교체한다. 똑같은 고민과 오뇌로 다리를 놓고서…

영신은 앉아서 꿈을 꾸는 사람처럼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다가,

“제 속을 들여다 보시는 것 같아서…”

간신히 한 마디를 꺼내고는 말 끝을 맺지 못하더니,

“제 사정은 대강 아시는 터이지만, 얼마전에 어머니가 청석골까지 다녀가셨어요. 제발 고만 시집을 가라고 이틀밤이나 꼬박이 새워가며 빌다시피 하시는 걸 끝끝내 시원한 대답을 못해 드렸어요.”

“그래서요?”

“그랬더니, 나중엔 '네가 이 홀어미 하나를 영영 내버릴 테냐' 고 자꾸만 우시는 데는 참 정말 뼈를 깎아내는 것 같아서…”

영신은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참느라고 이를 악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