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혁은 술이 몹시 취한 사람처럼 앞을 가누지 못하더니 그 유착한 몸이 폭 엎어지자, 영신의 소담한 손등은 남자의 뜨거운 입김과 축축한 입술을 느꼈다.
영신은 온몸을 달팽이처럼 오므라뜨리고는 눈을 사르르 내려감고 있다가,
“참 이 바닷가엔 해당화가 없을까요?”
하고 딴전을 부리며 살그머니 손을 빼어 내려고 든다. 그러나 그 손끝과 목소리는 함께 떨려 나왔다.
동혁은 두 팔로 영신의 어깨와 허리를 버쩍 끌어안으며,
“해당화는 지금 이 가슴속에서 새빨갛게 피지 않았에요?”
하더니, 불시의 포옹에 벅차서 말도 못하고 숨만 가쁘게 쉬느라고 들먹들먹하는 영신의 젖가슴에, 한아름이나 되는 얼굴을 폭 파묻었다.…
영신은 생후 처음으로 경험하는 남자의 뜨거운 입술과 소름이 오싹오싹 끼치도록 근지러운 육체의 감촉에 아찔하게 도취되는 순간 잠시 제 정신을 잃었다.
동혁은 숨결이 차츰차츰 가빠 오고, 두근두근하는 심장의 고동까지 입술이 닿은 손등과 그의 얼굴에 짓눌린 가슴을 통해서 자릿자릿하게 전신에 전파된다.
영신은 조심스러이 손 하나를 빼어 목사가 세례를 주는 것처럼 부스스하게 일어선 동혁의 머리 위에 얹으며,
“고만 일어나세요. 네?”
하고 달래듯이 가만히 흔들더니,
“나두요, 동혁씨의 고민을 말씀하지 않어두 잘 알고 있어요. 동혁씨가 내 맘을 이해해 주시는 것처럼 - 그러기에 이태 동안이나 그다지 그리워하던 당신께 제 사정을 하소연하려고 일부러 온 거야요. 이 세상에 다만 한 분인 동지한테 제 장래를 의논하려고요…”
동혁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지독하게 마취를 당했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게슴츠레해진 눈으로 눈물에 어리운 영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나는 영신씨를 언제까지나 동지로만 사귈 수가 없에요.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에요!”
하고는 또다시 그 돌공이같은 팔로 영신의 허리를 끊어져라고 껴안는다. 영신은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아서 손에 힘을 주어,
“이러지 마세요. 이렇게 흥분하시면 못써요. 우리 냉정하게시리 얘기를 하십시다.”
하면서 허리에 휘감긴 동혁의 팔을 슬그머니 풀었다. 그리고는,
“어쩌면 저 역시도 동지로 교제하는 것만으론 만족할 수가 없는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그 문제를 백 번 천 번이나 생각해 봤는데…”
“어떻게요?”
동혁은 머리를 숙인 채 매우 조급히 묻는다. 영신은 조금 떨어져 앉아서 잠시 머리 속을 정돈시킨 뒤에 입을 연다.
“연애를 하는 데 소모되는 정력이나 결혼 생활을 하느라구 또는 개인의 향락을 위해서 허비되는 시간을 온통 우리 사업에다 바치고 싶어요. 난 내 몸 하나를 농촌 사업이나 계몽 운동에 아주 희생하려고 하나님께 맹세까지 한 몸이니깐요.”
“그러니까 그렇게 굳은 결심을 하고, 실지로 일을 해 나가는 사람끼리 한 몸뚱이로 뭉쳐서 힘을 합하면 곱절이나 되는 효과를 얻지 않겠에요? 백지장두 마주들면 낫다는데 - 영신씨를 만난 뒤버텀 나는 줄창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요. 어느 기회에 나를 따라와 주실 줄을 나 혼자 믿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구요.”
“왜 낸들 그만 생각이야 못해 봤겠어요? 그렇지만 우리의 교제가 이버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필경은 결혼문제가 닥쳐오겠죠?”
“그럼 언제꺼정 독신생활을 하실 작정이신가요?”
영신은 그 말대답을 주저하고, 손풍금을 집어들고 어루만지며,
“이걸 나한테 선사한 미스 빌링스란 서양 부인은 미개한 남의 나라에 와서 별별 고생을 다 해 가면서 우매한 백성을 깨우쳐 줄 양으로 오십이 넘두룩 독신 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런 여자의 생활이야 말루 거룩하지 않아요, 깨끗하지 않아요?”
“그 사람네와 우리와는 환경이 다르구 처지도 다르지만, 영신씨가 그런 사람의 본을 떠서 독신 생활을 해 보겠다는 건 우리의 현실이 허락지 않는 아름다운 공상에 지나지 못할 줄 알아요.”
“그러니까 남몰래 살이 내리도록 고민을 하는 게 아니겠어요? 이렇게도 못하고 저렇게도 할 수가 없으니깐…”
“그런 경우엔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지 말고, 양단간 결단을 내야만 하지요.”
“그만한 결단성이 없는 건 아니야요. 그렇지만 난 청석골을 떠날 수가 없어요. 나를 낳아 준 고향보다도 더 정이 들었구요. 나 하나를 무슨 천사처럼이나 알아주는 그 고장 사람들을, 그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요!”
“저엉 그러시다면 당분간 내가 청석골 천사한테 데릴사위로 들어갈까요? 나 역시 이 한곡리에다가 뼈를 파묻으려는 사람이지만…”
하고 시꺼먼 눈을 끔쩍끔쩍한다. 영신은,
“호호호, 그건 참 정말 공상인데요.”
하고 동혁의 무릎을 아프지 않게 치며 별 하늘을 우러러 명랑히 웃는다.
“……”
“……”
동혁이도 덩달아 웃는 체하다가, 속으로는 갑갑해 못견디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선다. 한참 동안이나 신부리로 바위를 툭툭 걷어차기도 하고, 돌멩이를 집어 팔매도 치면서도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비장한 결심을 한 듯이 다시 돌아와 영신이 앞에 바싹 다가앉으며, 손가락 셋을 펴들더니,
“자, 앞으로 삼 년만 더!”
하고 부르짖으며 영신의 턱 밑을 치받치듯 한다.
“인제 삼개년 계획만 더 세우고 노력하면 피차에 일터가 단단히 잡히겠지요. 후진들한테 일을 맡겨도 안심이 될만큼 기초가 든든히 선 뒤에 우리는 결혼을 하십시다. 그리고는 될 수 있는대로 좀더 공부를 하면서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하십시다.”
하더니 잠시 뜸을 들이다가,
“영신씨! 그때까지 기다려 주실 테지요, 네? 꼭 기다려 주실테지요?”
하고 영신의 두 손을 꼭 잡고 으스러지도록 힘을 준다.
“삼 년 아니라 삼십 년이래두…이 목숨이 끊…”
하는데 별안간 영신의 입술은 말 끝을 맺을 자유를 잃었다. 지새려는 봄 밤, 잠 깊이든 바다의 얼굴을 휩쓰는 쌀쌀한 바람이 쏴 - 하고 또 쏴 - 하고 타는 듯한 두 사람의 가슴에 벅차게 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