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조금 전까지 안타까이 하나님을 부르며 '일과 사랑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택해 줍소서!' 하고 빌던 그 상대자가 뜻밖에 유령과 같이 눈앞에 나타난 데는 형용키 어려운 신비를 느꼈다. 신비스럽다느니보다도 폭풍우처럼 뒤설레던 감정이 짓눌리고 머리가 저절로 수그러질이만큼 엄숙한 기분이 온몸을 지배하는 것이다.

“앉으십시다.”

동혁은 바위 아래 모래밭을 가리키고 저 먼저 앉으며 두 무릎을 끌어안고는 바다 저편을 바라 본다. 아득한 수평선을 따라 일렬로 쭈욱 깔린 것은 달빛을 새우는 듯한 새우잡이 중선의 등불들이다. 아까까지 영신은 그 불을 얕은 하늘의 별들이 반짝이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이리 와 앉으시라니까요.”

눈을 내리감고 발끝으로 모래를 허비적거리며, 서 있는 영신을 돌아다보고, 동혁은 명령하듯 한다.

 

“네…”

 

영신은 들릴 듯 말 듯하게 대답을 하고 동혁의 곁에가 치맛자락을 휩싸쥐고 앉는다. 오늘밤만은 동혁의 어떠한 요구에든지 순종하려는 듯이…”

“차차 바람이 이는데 춥지 않으세요?”

“아아뇨.”

바닷가의 밤은 점점 깊어만 가는데, 해금내를 머금은 바람이 솔솔 불어오기 시작해서 이슬에 촉촉히 젖은 몸이 감기나 들지 않을까 하고 동혁은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온 몸의 피를 끓이며 노래를 목청껏 부르던 영신은 도리어 홧홧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인제 오셨어요? 오늘밤엔 못 만날 줄만 알았는데…”

“한 이십 리나 되는데, 누굴 좀 만나 보려구 찾아갔다가 오는 길이에요.”

“그럼 여태 저녁두 안 잡수셨게요?”

“주막거리서 요기를 해서 시장하진 않아요.”

“무슨 급한 일이 생겼어요?”

“급하다면 급하지요…”

하고 동혁은 더 자세한 대답을 피하느라고,



“참 달도 밝군요!”

하고 딴전을 부리며 서녘 하늘을 쳐다본다.

볕에 그을어 이글이글하게 타는 듯하던 얼굴과 그 건강한 몸뚱이를 기울어 가는 창백한 달빛이 씻어내린다. 파르스름한 액체와 같은 달빛이…

영신은 다시 무슨 생각에 잠겨, 동혁의 커다란 그림자가 저의 눈앞에 가로 비친 것을 들여다보고 잠자코 있다. 조금 전까지도 외로움과 쓸쓸함을 못 견디어 바람 받이에 외따로 선 나무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던 영신은 동혁이가 와서 제 곁에 턱 앉은 것이 큰 바위 속에다가 뿌리를 박은 것만큼이나 신변이 든든한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애상적이던 기분은 구름과 같이 흩어지고 안개처럼 스러졌다. 다만 동혁의 윤곽만이 점점 뚜렷하게 커져서 제 몸이 그 그늘 속으로 차츰차츰 기어들어가는 것같은 환각을 느낄 따름이었다.

한참만에 동혁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 오실 때 편지에 꼭 친히 만나서 의논할 말씀이 있다고 그러셨지요? 그걸 지금 말씀해 주시지요. 하룻밤쯤 새우는 게 우리한텐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내일은 기어이 떠나신다니 또 만날 기회가 졸연치 않을 것 같은데, 꼭 해 주실 말씀이면 지금 하시지요.”

영신의 머리는 수그러만 드는데, 동혁의 눈은 점점 탐조등처럼 빛난다.

“왜 말씀을 못하세요? 무슨 말인지 시원스럽게 해 버리시지요.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영신은 그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제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럼 동혁씨가 하고 싶으신 말씀부텀 먼저 해 주세요.”

“아아니, 내가 먼첨 물었으니까 영신씨버텀 대답을 하실 의무가 있지 않겠어요?”

“그래도 먼첨 해 주세요. 권리니 의무니 하고 빡빡하게 구실것 없이…”

영신의 목소리에는 소녀와 같은 응석조차 약간 섞였다.

“그건 안될 까닭이 있에요. 언권을 먼저 드리지 않으면 분개하시는 성미를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 말 한 마디에 이태 전 △△일보사 주최의 간친회 석상에서 처음 보았을 때의 인상과, 악박골서 밤을 새우던 때의 정경이 바로 어제런듯 주마등과 같이 두 사람의 눈앞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