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하면 짐작하겠에요. 요컨대 어머니께선 그런 착실한 사람을 데릴사위처럼 얻어서 늙으신 몸을 의탁하고, 인젠 딸의 재미를 좀 보시겠다는 게지요?”
“그런 눈치야요.”
동혁은 무엇을 궁리할 때면 의례히 하는 버릇으로, 두 눈을 꿈벅꿈벅하고 있다가, 신중한 어조로
“그럼 워낙, 주의나 이상은 맞지 않더래두 그 사람한테 혹시 애정을 느껴보신 적은 있기가 쉬울 듯한데…”
하고 가장 중요한 대문을 묻는다. 그 말에 영신은 뻗었던 두 다리를 오그리고 치마를 도사리며,
“어려서버텀 봐 오던 사람이니까, 딱 마주치면 무조건하고 반갑긴 해요.”
하고 잠시 침묵하다가,
“그렇지만, 난 누구한테나 입때까지…저어 동혁 씨를 만나기 전까지두…”
하고는 저고리 고름을 손가락에다 돌돌 감았다 폈다 한다. 동혁이도 자리를 고쳐앉더니 영신의 얼굴을 면구스럽도록 똑바로 들여다보며,
“영신씨는 어머니를 위해서, 사랑이 없는 남자에게 한평생을 희생해 바칠 그런 봉건적인 여자는 아니겠지요?”
하니까,
“그런 말씀은 물어 보실 필요도 없겠죠.”
하고 영신은 자존심을 상한 듯이 자신 있는 대답을 한다.
“그럼 앞으로 어떡하실 작정이세요?”
“그이는 단념하겠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미련은 남겠단 말씀인가요?”
“아아뇨.”
“그러믄요?”
“……”
동혁은 영신이가 경솔히 대답하지 못하는 심중을 약빨리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욱하지 않았다.
“그럼 내 태도를 보신 뒤에, 좌우간 결단을 하시겠단 말씀이지요?”
동혁이도 자신 있게 다져 묻는다. 그 말에 영신의 입에서는 분명히
“네!”
하고 한 마디가 서슴지 않고 떨어졌다.
동혁은 불시에 그 무엇이 마음속에 뿌듯하도록 꽉 차는 것을 느꼈다. 그 만족감은 물에 불어오르는 해면(海綿)처럼 또는 한정 없이 부풀어오르는 고무 풍선처럼 당장 터질 듯 터질 듯하다.
동혁은 벌떡 일어섰다. 팔짱을 꽉 끼고 달빛에 뛰노는 바다를 바라보고 섰노라니, 그 바다의 물결은 커다란 용광로 속에서 무쇠가 녹은 물이 부글부글 끓는 것같아 보인다. 바다 위가 아니라 바로 저의 가슴 한복판에서 용솟음치는 정열을 눈앞에 보는 듯하였다.
한 십분 동안이나 동혁은 머리를 폭 수그리고 영신의 눈앞에서 조약돌만 탁탁 걷어차면서 왔다 갔다 하였다. 그러다가 사기 단추와 같이 손집는 데가 반짝거리는 손풍금을 집어들더니,
“아까 그 곡조 한 번만 더 타 주세요.”
하고 영신의 치마 앞에다 떨어뜨린다.
영신은 마지못해서 풍금을 받아들면서도,
“얘기를 하다 말고 이건 뭐에요!”
하고 뒤설레는 마음을 진정하느라고 몸 둘 곳을 몰라하는 동혁을 쳐다본다.
“글쎄 특청이니 두 말씀 말구 타 주세요.”
이번에는 반쯤 명령하듯 한다. 영신은 그만 청을 거역하기가 어려워서 풍금 손잡이에 손가락을 끼면서,
“아까 그건요, 되나 안되나 함부루 타 본 건데 나두 무슨 곡존지 잊어버렸어요.”
하고 고개를 외로 꼬더니,
“왜 우리가 다 아는 훌륭한 곡조가 있지 않아요. 난 어딜 가서든지 동혁씨와 한곡리 생각이 나면 이 곡조를 탈 테야요.”
말이 끝나자, 영신은 찬찬히 팔을 폈다 오므렸다 한다. 곡조는 시작만 들어도 애향가다. 그러나 조기회 때에 부르는 것과는 딴판으로 느릿느릿하게 타는 그 멜로디는 가늘게 떨며 그쳤다 이었다 하는 것이 무엇을 호소하는 듯이 몹시 애련하다. 이 밤만 밝으면 기약없는 길을 또다시 떠나는 그 애달픈 이별의 정을 조그만 악기 속에 가득히 담았다 흩었다 하기 때문인 듯…
허공에 얼굴을 쳐들고 두 눈을 딱 감고 섰던 동혁은 듣다 못해서,
“그만 집어칩시다!”
하고 외친다. 그래도 얼른 그치지를 않으니까, 와락 달려들어 손풍금을 빼앗더니 백사장에다 동댕이를 친다. 영신은 어쩐 영문인지를 몰라서 어리둥절하고 입을 조금 벌린 채로 동혁의 눈치만 살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