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경애하는 동혁씨!'

영신이가 한곡리를 떠난 지 사흘만에 온 편지의 서두에는 전에 단골로 쓰던 '존경' 두 자의 높을 존(尊)자가 떨어지고, 그 대신으로 사랑 애(愛)자가 또렷이 달렸다.

'무한한 감사와 가슴 벅찬 감격을 한아름 안고 무사히 저의 일터로 돌아왔습니다. 그 감사와 감격은 무덤 속으로 들어간 뒤까지라도 영원히 영원히 잊지 못하겠습니다.

떠날 때에 바쁘신 중에도 여러분이 먼 길을 전송해 주시고, 배표까지 사주신 것만 해도 염치없는데, 꼭 배 안에서 뜯어 보라구 쥐어 주신 봉투 속에 십 원짜리 지전 한 장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몇 번이나 다시 돌려보내려고 하였으나 한창 어려운 고비를 넘는 농촌에서 십 원이란 큰 돈을 변통하기가 얼마나 어려우셨을 것을 알고 또는 제가 떠나기 전날 밤에 이 돈을 남에게 취하려고 몇 십리 밖까지 가셨다가 늦게야 돌아오셨던 것이 이제야 짐작되어서, 차마 도로 부치지를 못하였습니다.

몸 보할 약이라도 한 제 지어 먹으라고 간곡히 부탁은 하셨지만, 백 원 천 원 보다도 더 많은 이 돈을 저 한 몸의 영양을 위해서는 쓸 수 없습니다. 그대로 꼭 저금해 두었다가 가을에 지으려는 학원 마당 앞에 종을 사서 달겠습니다. 아침 저녁 저의 손으로 치는 그 종소리는 저의 가슴뿐 아니라, 이곳 주민들의 어두운 귀와, 혼몽히 든 잠을 깨워주고 이 청석골의 산천초목까지도 울리겠지요.

나의 경애하는 동혁씨!

자동차가 닿은 정류장에는 부인 친목계의 회원들과 내 손으로 가르치는 어린이들이 수십 명이나 마중을 나와서 손과 치마꼬리에 매어달리며 어찌나 반가와서 날뛰는지 눈물이 자꾸 쏟아지는 것을 간신히 참았어요.

더구나 계집아이들은 거의 십 리나 되는 산길을 날마다 두 번씩이나 나와서 자동차 오기를 까맣게 기다리다가 '우리 선생님 아주 도망갔다'고 홀짝홀짝 울면서 돌아가기를 사흘 동안이나 하였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어느 누가 그다지도 안타까이 저를 기다려 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 변변치 못한 채 영신이를 그다지도 따뜻이 품어 줄 고장이 이 세계의 어느 구석에 있겠습니까?

나의 경애하는 동혁씨!

이번 길에 저는 고향 하나를 더 얻었어요. 한곡리는 저의 제 삼의 고향이 되고 말았어요. 저와 한평생 고락을 같이 하기로 굳게굳게 맹세해 주신 당신이 계시고 씩씩한 조선의 일군들이 있고, 친형과 같이 친절히 굴어주는 건배 씨의 부인과 동네의 아낙네들이 살고 있는 곳이 어째서 저의 고향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새로 얻어서 첫 정이 든 고향을 꿈에라도 잊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가슴에 피를 끓이던 그 애향가의 합창을…

나의 가장 경애하는 동혁씨!

저는 행복합니다. 인제는 외롭지도 않습니다.

큰덕미 나루터의 커다란 바윗덩이와 같이 변함이 없으실 당신의 사랑을 얻고, 우리의 발길이 뻗치는 곳마다, 넷째 다섯째 고향이 생길 터이니, 당신의 곁에 앉았을 때만큼이나 제 마음이 든든합니다. 저의 가슴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몸의 책임이 더한층 무거워진 것을 깨닫습니다.

청석골의 문화적 개척사업을 나 혼자 도맡은 것만 하여도 이미 허리가 휘도록 짐이 무거운데 우리의 사랑을 완성할 때까지 불과 삼 년 동안에 그 기초를 완전히 닦아 놓자면 그 앞길이 창창한 것 같습니다. 양식 떨어진 사람이 보릿고개를 넘기는 것만큼이나 까마아득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들은 가난하고 힘은 아직 약하나, 송백처럼 청청하고 바위처럼 버티네'하고 애향가(愛鄕歌)의 둘째 절을 부르겠어요!


나에게 다만 한 분이신 동혁씨!

그러면 부디부디 건강히 일 많이 하여 주십시오. 그동안 밀린 일이 많고 야학 시간이 되기도 전에 아이들이 몰려와서 오늘은 더 길게 쓰지 못하니 이 편지보다 몇 곱절 긴 답장을 주십시오. 다른 회원들에게 안부 전해 주시고 건배 씨 내외분에게도 틈나는 대로 따로이 쓰겠습니다.

△월 ◇◇일

당신께도 하나뿐인 채영신 올림'

영신은 어머니에게와 아버지가 혼인을 정해 준 남자에게도 편지를 썼다.

앞으로 몇 해 동안 결혼문제 같은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겠고 또는 이 뒤에라도 당신과는 이상이 맞지 않고, 주의가 틀려서 억지로 결혼을 한대도 결단코 행복스러운 생활을 할 수가 없겠으니 이 편지를 보고는 아주 단념해 주기를 바란다는 최후의 통첩을 띄웠다.


동혁이와 삼십 년 동안이라도 기다리겠다는 언약을 한 이상 연애니 결혼이니 하는 번거로운 문제로 새삼스러이 머리를 썩힐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질질 끌고 나가는 것은 여러 해를 두고 저를 유념해 온 상대자에게 대해서 매우 미안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한 일주일 뒤에야 어머니에게서는,

'진정으로 네 생각이 그렇다면 인력으로 못할 노릇이나, 딸자식 하나로 해서 이 어미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줄이나 알아다오'

하는 대서편지가 왔고, 금융조합에 다니는 남자에게서는,

'얼마나 이상이 높고 주의가 맞는 남자와 결혼을 해서 이 세상 복록을 골고루 누리며 사나 두구보자. 아무튼 조만간 직접 만나서 최후의 담판을 할 테니 그런 줄 알라'

는 저주 비슷한 회답이 왔다. 그 사람이야 다시 오건 말건, 영신은 남이 억지로 짊어지워 준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것만큼이나 마음이 거뜬하였다.

'자 인젠 일이다! 일을 하는 것밖에 없다! 앞으로 삼 년이란 세월을 지루하지 않게 보내기 위해서라도 힘껏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 하고 그 몸을 스스로 채찍질하였다.

일주일 동안 한곡리에서 받은 자극도 컸거니와 동혁이와 약혼을 한 것으로 말미암아 여간 큰 충동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그래서 청석골로 돌아온 뒤에도 며칠 동안은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고, 그때까지도 흥분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그러나 그 반면으로 건강은 아주 회복이 되어서 먼동이 훤하게 틀 때에 일어나 기도회에 참례를 하고 낮에는 학원을 지을 기부금을 모집하러 몇 십리 밖까지 다니거나, 그렇지 않으면 부인 친목계의 계원들과 같이 발을 벗고 들어서서 원두밭을 매고 풀을 뽑고 하다가 저녁을 먹고 나면 그 자리에 쓰러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예배당으로 가야 한다.

가서는 서너 시간이나 아이들과 아귀다툼을 해가면서 글을 가르치고 나오면, 다리가 굳어 오르는 것 같고 고개를 꼲을 힘까지 빠져서 길가에 잔디밭만 보아도 턱 누워 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하숙하는 집까지 와서는 자리도 펼 사이가 없이 곯아떨어진다.


그렇건만 아침에 벌떡 일어나서 냉수에 세수를 하고 나면 새로운 용기가 솟는다. 아침마다 제 시간이 되면 동혁이가 부는 나팔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오는 것 같아서, 좀 누웠을래야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까지 놀 새가 없는 농번기가 닥쳐왔건만 강습소의 아이들은 나날이 늘어 오리 밖 십리 밖에서까지 밥을 싸 가지고 다니고 기부금이 단 돈 몇 원씩이라도 늘어가는 것과, 친목계의 계원들도 지도하는 대로 한 몸뚱이가 되어 한 사람도 마을을 다니거나 버정거리는 사람이 없이 닭을 기르고 누에를 치고 또는 베를 짠다.

영신은 그러한 재미에 극도로 피곤하건만, 몸이 괴로운 줄을 모르고 하루 이틀을 보냈다. 사업이 날로 늘어가고 모든 성적이 뜻밖으로 좋아질수록, 끼니때를 잊을 적도 있고 심지어는 며칠씩 머리도 빚지 못하기가 예사였다.

그러나 틈이 빠끔하게 나기만 하면 동혁의 환영(幻影)에게 정신을 사로잡히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바닷가의 기울어 가는 달밤… 모래 위에 그 육중한 몸뚱이를 몸부림치며 사랑을 고백하던 동혁이… 온 몸뚱이가 액체로 녹을 듯이 힘차게 끌어안던 두 팔의 힘… 숨이 턱턱 막히던 불같은 키스…

영신은 그 장면이 머리 속에 떠오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고 얼굴이 화끈화끈 달았다. 그날 밤 그 하늘에 떴던 달이나 별들 밖에는 그 장면을 본 사람이 없으니 아무도 두 사람의 마음속의 비밀을 알 리 없건만 그대도 동혁의 생각이 불현듯이 나서 멀리 남녘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고 섰을 때에는 곁에 있는 사람이 제 속을 뚫고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머리가 저절로 수그러들기도 여러 번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