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 사람아, 난 여태 저녁두 안 먹구 기다렸네.”


하는 것도 허물없는 친구를 대하는 태도다.

“그럼 시장하시겠군요.”

하고 동혁은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라는 듯이, 툇마루 끝에 가 걸터앉았다. 방으로 들어가자는 것을,

“회관을 지은 뒤에 처음 총회가 있어서 곧 가봐야겠어요.”

하고 한사코 들어가지를 않았다. 방으로 들어만 가면 으례껀으로 술상이 나오고 술을 억지로 권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 예서라도 한 잔 해야겠네. 술을 입에두 안 댄다니 파계(破戒)를 시키군 싶지만, 워낙 자넨 고집이 센 사람이 돼 놔서.”

하고 준비해 놓았던 술상을 내왔다.

술이란 저의 집에서 사철 떨어뜨리지 않고 밀주를 해먹는, 보기만 해도 고리타분한 막걸리 웃국이요, 안주라고는 언제 보아도 낙지 대가리 말린 것에 마늘장아찌뿐이다. 칠팔 년이나 면서기를 다니는 동안에 연회석 같은 데서는 남이 태우다가 꺼버린 궐련 꼬투리를 주워 피우면서도 단풍 한 갑 안 사 먹던 위인으로는 근래 교제가 부쩍 늘어서 면이나 주재소에서 양복장이가 나오면 으례 술까지 내는 것이다.

“하아 이거, 내가 사람을 앉혀 놓구서 인호상이자작(引壺觴而自酌)을 하니 어디 맛이 있나.”

하고 '고문진보' 뒷다리나 읽어 본 티를 내지 못해서 애를 쓴다. 그러나 '숙습(熟習)이 난당(難當)'이라고 써야 할 자리에 '수습이 난방이로군' 하는 따위가 예사여서, 정말 글방에서 종아리깨나 맞아본 사람의 코웃음을 받는 때가 많다.

기천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서 술기운을 빌려는 것이다.

사실 동혁의 앞에서는 무슨 말이고 함부로 꺼내기가 어려웠다. 농우회에도 다른 회원들 같으면, 그 반수가 저의 논의 소작인이니까 여차직하면 '논 내놔라' 한 마디만 비치면은 설설 기는 터이니 문제가 되지를 않고, 건배만 하더라도, 키 크고 싱겁지 않은 사람 없다고, 원체 허풍선이가 돼서 술 몇 잔에 속을 뽑히는데, 농사터는 한 마지기도 없이 엉터리로 사는 사람이니까 돈을 미끼로 물려서 낚아 볼 자신도 있다.

그러나 유독 동혁이만은 그야말로 눈의 가시다. 천생으로 사람이 묵중해서 당최 뱃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는데, 근처에 없는 고등 교육까지 받아서, 마주앉으면 제가 도리어 인품에 눌리는 것 같다.

기천은 다리를 도사리고 앉아서 고무신의 때가 고약처럼 묻은 버선바닥을 쓰다듬던 손으로, 술잔을 들고 쭈욱 들이키고는, 족제비털 같은 노랑수염을 배비작거려서 꼬아 올리더니,

“좀 하기 어려운 말일쎄…”

하고 반쯤 외면을 한 동혁의 눈치를 곁눈으로 훑어본다.

“말씀하시지요.”

동혁은 '또 무슨 말을 꺼내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하면서도 들으나마나 하다는 듯이 어둑어둑 해가는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앉았다.

기천이는 실눈을 뜨고 손톱여물을 썰더니,

“자네 그 회관 짓기에 얼마나 들었나?”

하고 다가앉는다.

“돈이요? 돈이야 얼마 안 들었지요.”

기천은 다리를 도사리고 고쳐 앉으며 용기를 내어,

“이런 말을 자네가 어떻게 들을는지 모르겠네만 진흥회가 생기면 회관이 시급히 소용이 되겠는데 당장 지을 수는 없구… 거기가 동네 한복판이 돼서 자리가 좋아. 그러니 여보게, 거 어떻게 재목 값이든지 품삯꺼정 넉넉히 따져서 내게루 넘길 수가 없겠나. 자네들은 한번 지어 봐서 수단이 났으니까, 딴 데다가 다시 지으면 고만일 테니…자네 의향이 어떤가?”


하고 얼굴을 반짝 쳐든다. 너무나 얌치빠진 소리에, 동혁은 어이가 없어 '얼굴 가죽이 간지럽지 않느냐'는 듯이 기천을 뻔히 쳐다보다가,

“왜 돈 만원이나 내노실 텝니까?”

하고 껄껄껄 웃었다. 기천은,

“아아니, 이 사람 웃음의 말이 아닐쎄.”

하고 금시 정색을 한다.

“글쎄 웃음의 말씀이 아니니까, 웃을 수밖에 없군요.”

동혁은 별이 반짝이기 시작한 하늘을 우러러 다시 한번 허청 웃음을 웃었다.

“허어 이 사람 그래도 웃네그려. 그 집을 이문을 붙여서 팔라는 데 실없이 웃을 게 뭐 있나?”

기천은 동혁이가 저를 놀리는 것 같아서 눈살을 찌푸린다.

“글쎄 생각을 좀 해 보세요. 그 집은 돈 아니라, 금 덩어리를 가지고도 팔거나 사지를 못합니다. 돈만 가지면 무슨 일이든지 맘대로 될 줄 아시는 모양이지만 억만원을 주고도 남의 정신만은 사지 못할 걸요. 그 회관은 팔려면 단돈 백 원어치도 못 되는진 모르지만, 우리 열 두 사람이 흘린 땀으로 터를 닦았구요, 지붕은 정신으로 쌓아 논 기념탑이니까요. 우리 손으로 부숴 버린다면 모르지만,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 집엔 손가락 하나 대지를 못합니다!”

“아아니, 글쎄 그런 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혹시나 하고 한 말일세.”

“혹시라니요? 한 단체가 공동으로 합력을 해서 지어논 집을, 나 한 개인이 팔아먹을 생각을 혹시나 하고 있을 것 같아서 그런 가당치 않은 말씀을 꺼내셨나요?”

이 한 마디에 기천은 그 빳빳하던 모가지가 자라목처럼 옴츠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

기천은 눈만 깜작깜작하고 담배를 붙여 물었다 부벼 껐다 하며 손으로 안간힘만 쓰고 앉았다.

'돈으로도 굴레를 씌울 수 없는 이 젊은 녀석을 어떡하면 꼼짝 못하게 옭아 넣을까' 하고 벼르고 있는 것이다. 한곡리서 대(代)를 물려가며 왕 노릇을 해 오던 터에 역시 대를 물려가며 '소인 소인'하고 저의 집 전장을 해먹던 상놈인 박가의 자식 하나 때문에, 위신이 떨어지고 돈놀이 해먹는 세력까지 은연중에 꺾이는 생각을 하면 이가 뽀드득뽀드득 갈렸다.

그러나 자는 호랑이 코침 주기로 동혁이를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열 두 회원이 이해 관계를 떠나서 벌떼처럼 일어날 듯한 데는 겁이 더럭 났다. 더구나 한번 심술만 불끈하고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동화가 무슨 짓을 할는지 그것도 무서웠다. 동화에게는 두어 번이나 여러 사람들 앞에서 모양 사나운 꼴을 당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근자에 와서 눈이 제자리에 박히고 귀가 바로 뚫린 사람이면 한곡리에서는 박동혁이가 중심이 되어 동리 일을 하고 인망과 인심이 농우회원에게로 쏠린 줄로 인정을 하는 데는 눈에서 쌍심지가 돋으리만큼 시기심이 났다. 그래서 어떠한 수단이든지 써서,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을 헤살을 놓을 계책을 생각하느라고 밤이면 잠을 못 자는 것이다.

그러다가 장차 발기될 진흥회의 역원이 되어 달라고 간청을 해도 말을 안 들으니까, 그 회관을 몇백 원이라도 주고 매수를 할 꾀를 낸 것이었다.

동혁은 갑갑한 듯이,

“그만 가 봐야겠에요.”

뻣뻣하게 한 마디를 하고 일어선다. 기천은 놓치면 큰 일이나 날 듯이 동혁의 손을 잡고 매달리듯 하며,

“여보게 동혁이, 낫살이나 먹은 사람이라구 너무 빼돌리질 말게. 나두 동네 일이 하구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닌가?”

하고 사뭇 애원을 한다. 동혁은 잡힌 손이 냉혈동물의 몸에나 닿은 듯이 선뜩해서 슬며시 뿌리쳤다. 기천은 또다시 실눈을 뜨고 무엇을 생각해 보더니,

“그럼, 자네들 회에 나같은 사람도 회원이 될 자격이 있나?”

하고 마지막으로 타협안을 제출한다.

“만 삼십 세 이하의 남자로 회원 반수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입회를 허락한다는 농우회의 규약이 있으니까요.”

동혁의 대답은 매우 냉정하다.

“그럼, 사십이 넘은 나같은 인생은 죽어 버려야 마땅하겠네 그려?”

기천은 간교한 웃음을 짓는다.

“아, 그래서야 어떡하게요? 그렇게 유력하신 분이 돌아가시면 우리 동네의 큰 손실일걸요.”

하고 동혁은 씽긋 웃으며 돌아섰다.

 

 

'5. 그리운 명절'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