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동혁이가 회관에서 주학을 마치고 나오는데(새 집으로 옮겨온 후 아이들이 부쩍 늘어서 주학까지 하게 되었다) 석돌이가 문밖에 기다리고 섰다가,
“저 강도사 댁 작은 사랑 나으리가, 저녁 때 잠깐 만나자고 하시는데요.”
한다.
“왜?”
동혁은 불쾌히 대답을 하였다. 석돌이는 눈썰미가 있고 영리한 대신에, 얕은 꾀가 많아서 항상 경계를 하는 회원이다. 더구나 강도사집 전답에 수다 식구가 목을 매어단 사람이어서 이 집에 심부름을 다니는 것은 물론, 박쥐 구실이나 하지 않는지가 의문이었다. 강도사집 살림살이의 실권을 쥔 맏아들인 기천이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처지에 있는 까닭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글쎄 왜 오라는 거야?”
동혁은 거듭 물었다.
“알 수 있어요? 조용히 꼭 좀 만나자고 일러 달라고 헙시니까요.”
“누가 왔든가?”
“아니요, 혼자 계시든걸요.”
“음, 알았네.”
동혁은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고 집으로 내려갔다.
기천이는 면협의원이요, 금융조합 감사요, 또 얼마 전에는 학교 비평의원이 된 관계로 면장이 나와서 한곡리도 진흥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 회장이 되도록 운동을 해보라고 권고를 하고 갔었다.
기천은 명예스러운 직함 하나를 더 얻게 된 것은 기쁘나, 군청이나 면소에서 시키는 대로 무슨 일이든지 하는 체 해야만 저의 면목이 서겠는데, 제가 수족같이 부릴 만한 청년들은 말끔 동혁의 감화를 받고, 그의 지도 밑에서 한 몸뚱이와 같이 움직이고 있으니 저는 개밥에 도토리 모양으로 따로 베져 났다.
저의 집의 논을 하고 돈을 쓴 낫살 먹은 작인들 같으면, 마구 내려누르고 우격다짐을 해도 그저 '잡어 잡수'하고 꿈쩍도 못하지만, 나이 젊고 혈기 있는 그 자질들은 까실까실해서 당초에 말을 들어먹지 않는다.
워낙 기천이가 대를 물려가면서 고리대금과 장리 벼로, 동리 백성의 고혈을 빨아서 치부를 하였고 - 주독으로 간이 부어서 누운 강도사는 지금도 제 버릇을 놓지 못한다. 당장 망나니의 칼에 목을 베이려고 업혀 가는 도둑놈이 포도군사의 은동곳을 이빨로 뽑더라는 격으로, 여전히 크게는 못해도 박물장수나 어리장수에게 몇 원씩 내주고 오푼변으로 갉아 모아서는 기직자리 밑에다가 깔고 눕는 것이 마지막 남은 취미다.
몇 해 전까지도 아들만 못지 않게 호색을 해서 주막의 갈보, 행랑계집 할 것 없이 잔돈푼으로 낚아들여서는, 대낮에 사랑 덧문을 닫기가 일쑤더니 운신을 못할 병이 든 뒤에야 그 버릇만은 놓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 저 혼자 사람의 뼈다귀인 것처럼 양반 자세가 대단해서 적실인심을 한 터이라, 새로운 시대에 눈을 뜨기 시작한 청년들은 기천이만 눈에 띠면, 무슨 누린내가 나는 짐승처럼 얼굴을 돌리고 슬금슬금 피한다.
그 중에도 성미가 부푼 동화는 '조놈의 발딱 제치고 다니는 대가리는 여불없이 약오른 독사 뱀 같더라' 하고 먼발치로 눈에 띠기만 해도 외면을 해 버린다.
그 아우는 노새라고 놀리기는 하면서도 '그래도 기만이는 강가의 중시조지'하고 간신히 사람 대우를 하지만… '또 무슨 얌치 빠진 소리를 하려누' 하고 동혁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기천이를 보러 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동화가 자꾸만 묻고 건배까지,
“왜 혼자만 꿍꿍이 셈을 치나?”
하고 궁금히 여기는 일은 다른 것이 아니다. 면장이 왔던 날 기천이는 술상을 차려놓고 동혁이를 청하였다. 그날 면장 앞이라 그런지, 평소처럼 점잖을 빼고 사람을 깔보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이 박 군이야말로 참 대표적으로 건실한 우리 동지입니다. 이번 그 회관 집만 하더래두 이 사람 혼자 지은 거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하고 새삼스러이 동혁을 소개하였다. 소개가 아니라, 이러한 모범 청년이 제 수하에서 일을 한다는 태도다. 동혁은 동지라는 말을 기만의 입에서 들을 때보다도 더 구역이 나서, 입에도 대지 않은 술잔을 폭삭 엎어놓았었다. 그래도 기천이가 연방 동지를 찾으면서 하는 말을 종합해 보면,
'면장께서 바쁘신데도 일부러 나오신 건 다름이 아니라 우리동네도 진흥회를 실시해야 되겠는데, 내야 어디 그런 일을 아는 사람인가? 허니 자네들이 힘을 좀 빌려줘야겠네. 자네야 중요한 역원이 돼줄 줄 믿지만 다른 젊은 사람들도 다 함께 회원이 돼서 일을 해 보두룩 하세' 하고 애가 말라서 간청을 하는 것이었다.
동혁은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난 할 수 없에요. 우리 농우회 일만 해도 힘에 벅찬데 한 몸으로 두 가지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쇠다.”
하고 딱 잡아떼고 일어섰다.
동혁이가 이번에는 버티고 가지를 않으니까, 기천이는 호출장처럼 명함을 들려 집으로까지 머슴을 보냈다.
“작은사랑 나으리께서 꼭 좀 건너오래유. 안 오면 이리로 오시겠다구 그러세유.”
하고 머슴애는 어서 일어나기를 재촉한다. 기천이는 면협의원이 되던 날 아침에, 행랑사람과 머슴들을 불러 세우고,
“오늘부터는 서방님이라구 그러지 말구, 나으리라구 불러라.”
하고 일장의 훈시를 하였던 것이다.
동혁은 중문간 문지방에 걸터앉아서 입맛을 다시다가,
“저녁 먹구 건너간다구, 가서 그러게.”
해서 머슴을 보냈다. 가고 싶은 생각은 손톱 끝만큼도 없지만, 집으로까지 찾아온다는 것이 싫어서 가마고 한 것이다.
저녁 뒤에 그는 말 대답할 것을 생각하면서 큰 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대문간에 들어서는데 작은 사랑 툇마루에서,
“아 그래, 제깐 녀석이 명색이 뭐길래 내가 부른다는데 냉큼 오질 못한다더냐?”
하고 그 되바라진 목소리로 머슴애를 꾸짖는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동혁은 '나 여기 대령했소'하는 듯이 바로 지척에서 으흠으흠하고 기침을 하고,
“저녁 잡수셨에요?”
하며 들어섰다. 기천은 도둑질이나 하다가 들킨 것처럼 움찔해서 반사운동으로 발딱 일어서기까지 하며,
“아, 자네 오나?”
하고 반색을 한다. 그 푼푼치 못하게 생긴 얼굴을 횟배를 앓는 사람처럼 잔뜩 찌푸리고 있다가, 뜻밖에 동혁이와 마주치는 순간, 금시 반가운 낯으로 표변하는 표정 근육의 민첩한 움직임은, 여간한 배우로는 흉내를 못 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