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에서는 배불리 얻어먹은 장타령군의 두목인 듯한 부대조각을 두른 자가 안중문으로 들이대고 헛침을 튀 튀 뱉더니,
“얼씨구 들어왔네, 품 품 바바바.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두 않구 또 왔소… 냉수동이나 마셨느냐, 시원시원 잘두 한다. 뜨물동이나 들이켰나 걸직걸직 잘두 한다.”
하고 곤댓짓을 하니까, 머리를 충충 땋아 늘인 총각녀석이 뒤를 대어,
“에 - 하늘 천자를 들구 봐, 자시에 생천하니 호호탕탕 하늘천(天), 축시에 생지하니 만물창생 따아 지(地)).”
하고 천자(千字) 뒷풀이를 청승맞게 한다.
광대는 줄에서 뛰어내려 땅재주를 훌떡훌떡 넘다가,
“사부댁 존전에 그저 처분만 바랍니다.”
하고 댓돌 위로 홍선을 펴 들고 기생들에게 눈짓을 슬쩍 한다. 기생들은 그 눈치를 약빨리 채고,
“아이고 영가암, 몇장 처분해 줍쇼그려어.”
하고 화롯가에 붙인 촛가락처럼 이리 곤드라지고 저리 곤드라지는 양복장이들의 옆구리를 찌른다. 그것을 본 한 낭청은,
“옛다, 그래라. 이런 때 돈을 못쓰면 저승에 가 쓰겠느냐.”
하고 새빨간 염낭을 끄르더니, 지전 한 장을 집히는 대로 꺼내서 광대의 얼굴에다 끼얹듯이 내던진다. 가랑잎처럼 휘둘다가 댓돌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언뜻 보기에도 일 원짜리는 아니다. 어릿광대는 지전을 집어 들고 주인에게 수없이 합장을 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그 수 없는 사람의 때가 묻은 지전을 입에다 물고 배운 재주는 다 부리는데, 대청 위에서는 기생들이 손들과 어우러져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다보고 섰던 영신의 눈은 점점 이상한 광채가 돌기 시작한다. 한 낭청은 첩에게 부축이 되어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다가, 아이들이 그저 마당가에 쪼그리고 앉은 것을 보고 혀꼬부라진 소리로,
“재, 재들은 왜 여태 저 저러구 앉었느냐!”
하고 화경이 된 것 같은 두 눈의 흰자위를 굴리며 영신을 내려다 본다. 영신은 마당 한복판으로 썩 나섰다.
“우리들이 댁에 뭘 얻어먹으러 온 줄 아십니까?”
그 목소리는 송곳 끝 같다.
“그 그럼 뭐 뭘 하러 왔노?”
“돈을 하도 흔하게 쓰신다길래 여기 손수 적어주신 기부금을 받으러 왔습니다!”
영신은 주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기부금 명부를 싼 책보를 끄른다. 낭청은,
“기부금? 아 그래 쇠털 같은 날에, 하 하필 오늘 같은 날 성군작당(成群作黨)을 하구 와서 내란말야? 기 기부금에 거 걸신이 들렸군.”
하고 사뭇 호령을 하고는 돌아서려고 든다. 영신은 뚱뚱보의 앞을 떡 가로막아 서며,
“안됩니다. 오늘은 만나 뵌 김에 천하없는 일이 있어두 받아 가지고야 갈 텝니다.”
하고 야무지게 목소리를 높인다. 손들과 구경군들이며 기생 광대 할 것 없이 어안이 벙벙해서 여선생을 주목한다. 영신은 마당 가득 찬 여러 사람을 향해서,
“여러분, 이런 공평치 못한 일이 세상에 있습니까? 어느 누구는 자기 환갑이라고 이렇게 질탕히 노는데, 배우는 데까지 굶주리는 이 어린이들은 비바람을 가릴 집 한 간이 없어서 그나마 길바닥으로 쫓겨났습니다. 원숭이 새끼처럼 담이나 나뭇가지에 매달려서 글 배우는 입내를 내고요, 조 가느다란 손가락의 손톱이 닳도록 땅바닥에다 글씨를 씁니다!”
하고 얼굴이 새빨개지며 목구멍에 피를 끓이는 듯한 어조로,
“여러분, 이 아이들이 도대체 누구의 자손입니까? 눈에 눈물이 있고 가죽 속에 붉은 피가 도는 사람이면, 그 술이 차마 목구멍으로 넘어갑니까? 기생이나 광대를 불러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놀아도, 이 가슴이 - 양심이 아프지 않습니까?”
하고 부르짖으며 저의 앙가슴을 주먹으로 친다.
손들은 도가 넘도록 취했던 술이 당장에 깬 듯, 서로 얼굴만 쳐다보는데 한 낭청은 어느 틈에 안으로 피해 들어가고, 젊은 주인은 영신의 앞을 막아서며,
“사이상(채 선생), 온 이거 어느 새 망령이시구려. 오늘 같은 날 참으시지요. 일이 잘못됐으니 그저 참아주세요. 그 돈은 저녁 안으로 꼭 보내드리리다.”
하고 말씨가 명주고름 같아지며 머리를 수없이 숙여 보인다.
영신은 흥분을 가라앉히느라고 숨만 가쁘게 쉬고 섰는데 처음부터 누마루 한 구석에 앉아서 영신의 행동을 노리고 내려다보던 주재소 수석의 눈은 점점 날카롭게 빛났다.
…그날 저녁부터 일주일 동안이나 영신은 경찰서 유치장 마루방에서 새우잠을 잤다. 본서까지 끌려가서 구류를 당하던 경과며 그 까닭은 오직 독자의 상상에 맡길 뿐이다.
동혁은 청석골이 가 보고 싶었다. 날이 가고 달이 바뀔수록 사랑하는 사람과 그가 활동하는 모양이 보고 싶었다. 날마다 이 일 저 일에 얽매여서, 잠자는 시간 밖에는 공상할 틈조차 없기는 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문득문득 영신의 생각이 나면, 손을 쉬고 발을 멈추고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는 습관이 부지중에 생겼다.
'그가 꿈결같이 다녀간 지가 언제이던가' 하면, 적어도 사 오년은 된 성싶었다. 편지만은 끊임없이 내왕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웬일인지 열흘이 훨씬 넘도록 영신의 소식이 끊어져서 여간 궁금히 지내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일전에야 기다란 편지가 왔는데 한 낭청이란 부자 집에 기부금을 걷으러 가서 창피를 당하고 분풀이를 실컷 하다가, 일주일 동안이나 고초를 겪었다는 것과 앞으로는 기부금 명부에 이름을 적은 사람에게도 자발적으로 주기 전에는 독촉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예배당 문까지 닫으라고 딱딱 을러메는 것을, 간신히 양해를 얻기는 했으나 무슨 수단을 써서든지 청석학원 하나는 기어이 짓고야 말겠다고 새로운 결심을 보인 사연이었다.
그러면서도 한번 구경이라도 와 달라는 말은 비치지도 안 한다. 반드시 청좌를 해야만 갈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 와 달랄까 하고 동혁은 편지마다 은근히 기다렸다. 그러나 오는 편지마다 판에 박은 듯한 사업 보고요, 고생하는 이야기뿐이다.
동혁은 그런 편지를 받을 적마다,
'나도 어지간히 버티는 패지만, 나보다도 한 술 더 뜨는 걸' 하고 편지를 동댕이치는 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