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수록 영신은 '어디 누가 견디나 보자'하고 단단히 별러 오던 터인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한 낭청의 환갑날 또다시 찾아가게 된 것이다. 그 집에 잔치가 있어서, 동네 어른들도 많이 갔다는 말을 비로소 아이들에게 들은 영신은 '옳다꾸나 마침 잘됐다. 오늘이야 설마 안 만나진 못하겠지' 하고 아이들이 따라오는 것을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여차직하면 만인 좌중에 그 돼지 같은 영감장이 고작을 들었다 놓으리라' 하고는 일종의 시위운동도 될 듯해서 조무라기는 쫓아 보내고 머리 굵은 아이들을 이십 명 가량만 추렸다. 그러나 큰 구경이나 빼어 놓고 가는 줄 알고,
“나두, 나두.”
하고 계집아이들까지 중간에서 행렬에 달라붙고 하여서 그럭저럭 오륙십 명이나 따라오게 된 것이다. 영신은,
“그 집에서 음식을 주더래두, 너희들은 받아 먹거나 싸 갖고 가선 안된다.”
하고 단단히 단속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 낭청 집의 솟을대문이 바라다 보이는 큰 마당터까지 와서는 '칩칩하게 음식이나 얻어먹으러, 애들까지 데리고 오는 줄이나 알지 않을까? 아뭏든 그 집의 경사날인데, 우르르 몰려가는 건 체면상 좀 재미 적은걸' 하고 두 번 세 번 돌아설까 하고 망설였다.
'가뜩이나 나를 못 믿겠다는데, 아주 상스런 여자나 흑작질군으로 치부를 하면 어떡하나' 하고 뒤를 사리려고 하다가, '계획적으로 하는 일이 아닌 담에야 내친걸음에 여기까지 왔다가 돌아서는 것도 비겁하다' 하고 용기를 돋아가지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집안은 온통 잔치 기분에 들떠서 소란스럽기 이를 데 없다.
광대는 꽃 부채를 펴들고 몸을 꼲으면서 줄을 타고 앉았다 일어섰다 용춤을 추다가 아래서 어릿 광대가,
“여봐라, 말 들어라.”
하고 먹이면, 줄 위의 광대는,
“오오냐, 말만 던져라.”
하면서 재담을 주고 받는다.
높은 산에 눈 날리듯
얕은 산에 재 날리듯
억수장마 비 퍼붓듯
대천바다 조수 밀듯
하고 이 댁에 돈과 곡식이 쏟아지고 밀려들라고 덕담을 늘어놓으면, 기생들은 대청 위에서,
얼시구 좋다 절시구
지화자 좋다 저리시구
하고 팔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장아장 주인의 앞으로 대섰다 물러섰다 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판에 영신의 일행은 사랑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의 빈객들은,
“이거 별안간 웬 아이들야?”
하고 서로 술 취한 얼굴을 돌아다보는데 줄 위에 오른 광대는 아이들이 발바닥 밑으로 우르르 달려드는 사품에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발을 헛딛고 떨어질 뻔하였다.
영신이도 잠시 어리둥절해서 당상 당하를 둘러보다가, 여러 사람의 눈총을 한 몸에 받으면서 댓돌 아래로 다가섰다. 몹시 불쾌한 낯빛으로 '저 딱정떼가 또 뭘하러 왔을까' 하고 영신의 행동을 말없이 보고 섰던 도의원 후보자(道議員候補者)는 여러 사람 앞이라 주인의 체모를 차리느라고 영신의 앞으로 와서 형식적으로 머리를 숙여 보이며,
“아, 사이상이 어떻게 오셨읍니까? 온 하두 정신이 숭숭해서 미처 청첩두 못했는데…”
하고 작은 사랑 편으로 올라가라고 손바닥을 펴대며 인도를 한다. 영신은 될 수 있는 대로 공손히 예를 하고는,
“네 고맙습니다. 올라가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고 마주 굽실거리다가 큰 마루 위로 향해서 늙은 주인도 들으라는 듯이,
“우리는 불청객이올씨다. 그렇지만 오늘 같은 경사스러운 날에, 멀지 않은 동네에 살면서 주인영감께 축하의 말씀 한 마디도 안 드릴 수가 없어서 오는 길에 아이들까지 이렇게 따라왔습니다.”
하고 만취가 된 한 낭청을 똑바로 쳐다본다. 늙은 주인은 정신이 몽롱한 중에도 영신을 알아본 듯 게게풀린 눈자위로 마당 그득히 들어선 아이들을 내려다보더니,
“허어, 귀한 손님들이로군. 조것들꺼정 내 환갑날을 어떻게 알았던고?”
하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매우 만족한 웃음을 웃고는,
“큰애 게 있느냐?”
하고 위엄 있게 큰아들을 불러 세우더니 아이들을 먹일 음식상을 차려 내오라고 명령한다.
“아니올씨다. 우리는 음식을 먹으려고 오질 않았습니다.”
하고 영신은 손을 내저었다. 젊은 주인은 어쩐지 형세가 불온해서 속으로는 적지 아니 켕기건만,
“모처럼 이렇게 오셨는데, 도무지 차린 게 변변치 않아서…”
하고 어름어름하다가 돌아서며 '저 숱한 애들을 뭘 다 노나먹인담' 하고 군소리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마루 위의 손들이 파흥이 된 것을 불쾌히 여기는 눈치를 채고, 한 낭청은 기둥을 붙들고 일어서며,
“아아니, 광대놈들은 뭘하는 셈이냐!”
하고 역정을 낸다. 풍악소리는 다시 일어나고 광대는 비실거리며 줄을 걷는다. 마당 가장자리에 쭈욱 둘러앉은 아이들은 광대가 줄을 타고 달리다가 뒷걸음을 쳤다가 하는 것을 정신없이 쳐다본다. 그중에도 계집애들은 간이 콩알만해지는 듯,
“에그머니! 저러다 떨어지면 어쩌나.”
하고 아슬아슬해서 손에 땀을 쥔다. 영신이도 광대가 줄을 타는 것을 처음 보아서 그편을 쳐다보고 섰는데, 이 집의 머슴들은 장타령군과 머슴애들이 먹던 그릇을 말끔 몰아 가지고 들어갔다.
조금 뒤에는 그 사발 대접을 부시지도 않고, 고명도 없는 밀국수에 장국 국물을 찔끔찔끔 처가지고 나와서는 그나마 두세 명에 한 그릇씩 안긴다. 그것을 본 영신은 크나큰 모욕을 느끼고 금시 눈에서 불이 나는 듯 두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여보! 우린 그런 음식 안 먹소!”
하고 꾸짖듯 하고는 머슴들의 앞을 딱 가로막아 섰다.
어떤 아이는 일러 준 말을 잊어버리고 국수 그릇에 손을 내밀다가 옴찔하고 선생의 눈치를 살핀다.
“아, 왜 이러시나요? 준비한 건 없지만, 온 주인 된 사람이 무안하군요.”
젊은 주인은 영신의 기색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얼더듬는다. 그 태도는 기부금을 못 내겠다고 버티던 때와는 딴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