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석골서 한 십리쯤 되는 흑석리(黑石里)라는 동리에 그 근처에서 제일 가는 부명을 듣는 그 한 낭청 집에서는 주인 영감의 환갑 잔치가 열렸다. 한 낭청은 한곡리의 강도사집보다 몇 곱절이나 큰 부자로(천 석도 넘겨 하리라는 소문이 난 지도 여러 해나 되었다) 근처 동리를 호령하는 지주다.
“큰 소를 한 마리나 잡아 엎었다더라.”
“읍내에서 기생하고 광대를 불러다가 소리를 시키고 줄을 걸린다더라…”
인근 각처에 소문이 굉장히 퍼졌다. 청석골서도 그 집의 논을 하는 작인들은 물론, 갓을 빌려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늙은 축들이 십여 명이나 떼를 지어 구경을 갔다. 여편네들도 풀을 세게 먹여서 버석거리는 치마를 뻣질러 입고 그뒤를 따랐다. 소를 통으로 잡아엎고 기생 광대까지 놀린다는 것은, 이 궁벽한 시골서 구경거리에도 주린 그네들에게 있어서 몇십 년에 한 번 만날지 말지 한 좋은 기회다.
“떵기덩 떵더꿍”
“닐리리 닐리리 쿵다쿵”
한 낭청 집 넓다란 사랑마당 큰 느티나무 밑에는 차일을 치고 마당 양 귀퉁이에는 작수를 받치고 팔뚝같은 굵은 참밧줄을 팽팽히 켕겨 놓았는데 갓을 삐딱하게 쓴 늙은 풍악잡이들이 북, 장구, 피리, 젓대, 깡깡이 같은 제구를 갖추어 풍악을 잡히기 시작한다. 주인영감이 큰 상을 받은 것이다.
덧문을 추녀끝에 추켜 단 큰사랑 대청에는 군수의 대리로 나온 서무주임 이하 면장, 주재소 주임, 금융조합 이사, 보통학교 교장 같은 양복장이 귀빈들은 물론, 일가친척이 각처서 구름같이 모여들어서 툇마루 끝까지 그득히 앉았다. 교자상이 몫몫이 나와서, 주전자를 든 아이들은 손님사이를 간신히 비비고 다닌다.
읍내서 자동차로 사랑놀음에 불려 온 기생들은 (기생이라야 요리 집으로 팔려 온 작부지만) 인조견 남치마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풍악에 맞추어,
만수산 만수봉에 만년 장수 있사온데
그 물로 빚은 술을 만년배에 가득 부어
이삼 배 잡수시오면 만수무강하오리다
하고 권주가를 부른다.
주인의 오른편에서 노랑수염을 꼬아 올리고 앉았던 면장은,
“사, 긴상 드시지요. 사, 이께다상…”
하고 커다란 은잔을 들어 주인과 주재소 수석에게 권한다. 10여 년이나 면장 노릇을 하면서도 한 획자로 긋고 두 획 내다 그은 것이 'サ'자인 줄도 모르건만 긴상 복상은 곧잘 부를 줄 안다. 달리 부를 수가 있는 자리에도 '상'자를 붙이는 것이 고작 가는 존대가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난홍이라고 부르는 기생은 잔대를 들고 노란 치잣물 같은 약주가 찰찰 넘치는 잔을 들어 손들이 권하는 대로 주인 영감에게 받들어 올린다. 한 낭청은 반백이 된 수염을 좌우로 쓰다듬어 올리고 그 술이 정말 불로 장생의 신약이나 되는 듯이 높이 들어 쭉 들어 마시곤 한다.
깍짓동처럼 뚱뚱해서 두 볼의 군살이 혹처럼 너덜너덜하는 한 낭청에게 버드나무 회초리 같은 계집들이 착착 부닐면서 아양을 떠는 것도 한 구경거리다.
이윽고 풍류 소리와 함께, 헌화하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일어난다. 술 주전자를 들고 혹은 진 안주 마른안주를 나르는 사내 하인과 계집 하인이 안 중문으로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하는 동안에 주객이 함께 술이 취하였다.
아침부터 안대청 자녀들이 헌수하는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 나온 한 낭청은 사방 삼십 센티미터나 됨직한 얼굴이 당호박처럼 시뻘겋게 익었다. 그 얼굴에다가 조그만 감투를 동그마니 올려놓은 것이 족두리를 쓴 것 같아서, 기생들은 아까부터 저희끼리 눈짓을 해 가며 낄낄대고 웃었다.
주인과 늙은 손들은 무릎 장단을 치며 시조를 부르다가 서로 수염을 꺼두르며 희롱을 하기 시작하고, 체면을 차리고 도사리고 앉았던 면장도, 분을 박같이 뒤집어 쓴 기생들의 뺨을 손등으로 어루만지며 음탕한 소리까지 하게 되었다.
“여봐라, 큰애 어디 갔느냐?”
한 낭청은 위엄 있게 불렀다. 뒤 처져 온 손님들의 주안상을 분별하던 큰아들이 올라와 두 손길을 마주 잡았다.
“여민동락(與民同藥)이라니, 저 손들두 얼른 내다 먹여라. 취투룩 먹여. 오늘 내 집에 술이야 떨어지겠느냐.”
하고는 뜰 아래에 쭈그리고 앉고, 혹은 멀찌감치 돌아서서 담배를 태우는 늙은 작인들을 턱으로 가리키며 분부를 내렸다.
머슴들은 바깥 마당에다가 멍석을 쭈욱 폈다. 막걸리가 동이로 나오는데, 안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르건만 그네들의 안주는 콩나물에 북어와 두부를 썰어 넣고 멀겋게 끓인 지짐이와 시루떡 부스러기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매방앗간에, 지난밤부터 진을 치고 있던 장타령군들이 수십 명이나 와르르 달려들어 아귀다툼을 해가며 음식을 집어들고 달아났다.
삼현육각이 잦은가락으로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아뢰고, 광대가 막 줄을 타고 올라설 때였다. 구경군이 물결치듯 하는데, 거의 오륙십 명이나 됨직한,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여선생의 인솔로 큰대문 안으로 들어온다.
그 여선생은 영신이었다. 학원을 지으려는 데만 열중한 그는, 그 전날도 기부금을 거두려고 삼십리 밖 장거리까지 갔다가 날이 저물어서, 그곳 교인의 집에서 묵고, 아침에 떠나서 오는 길에 서너집이나 들르느라고 점심때도 겨워서 흑석리 동구 앞까지 당도하였다.
청석골서 아직도 담을 넘겨다보며 글을 배우고, 땅바닥에 글씨를 익히고 하던 아이들은 점심들을 먹으러 가는 길에 채 선생이 오는 것을 신작로에서 먼 발치로 보고는,
“얘, 저기 우리 선생님 오신다.”
한 아이가 외치자, 여러 아이들은,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부르며 앞을 다투어 달려왔다. 여기 저기로 흩어져 가는 동무들까지 소리쳐 불러서 어느 틈에 삼사 십 명이나 영신을 둘러쌌다. 비록 하룻동안이라도 떠나 있다가 타동에서 만나니까 피차에 몇 달만에 얼굴을 대하는 것만큼이나 반가왔다. 영신이가,
“너희들은 먼저 가거라. 난 저 기와집엘 댕겨갈테니…”
하고 떼치려니까, 아이들은,
“나두 가유.”
“선생님, 우리두 갈 테유.”
하고 뒤를 따른다. 영신은 그 집에 오늘 잔치가 벌어진 줄을 까맣게 몰랐건만, 어른들에게 말을 들은 아이들은 선생님이 한 부자집 잔치에 청좌를 받고 가는 줄만 여기고 속셈으로는 음식을 얻어먹으려고 기를 쓰고 나서는 것이다.
한 낭청은 체면에 못 이겨서, 또는 취중에 자기 손으로 기부금을 오십 원이나 적었다. 그런지가 벌써 돌이 돌아오건만, 요리조리 핑계를 하고 오늘날까지 한 푼도 내지를 않아서, 요전번처럼 영신에게 창피까지 당하였었다.
오십 원짜리가 가장 큰 머리라, 영신은 그 돈으로 우선 재목이라도 잡아 보려고 십여 차나 그 집 문지방을 닳린 것인데, 근자에 와서는, 부자가 다 안으로 피하고 만나 주지도 않을 뿐더러, 도의원(道議員) 후보자로 군내에 세력이 당당한 한 낭청의 맏아들은 채 영신이가 기부금을 강청해서 주민들의 비난하는 소리가 높다고 경찰서에 가서 귀를 불었기 때문에, 영신이가 주재소에까지 불려가서 설유를 톡톡히 받았었고, 강습하는 아동이 제한 당한 것만 하더라도 그 여파인 것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