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혁에게서는 꼭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가 왔다.

사연은 간단한데 여전히 보고 싶다든지 그립다든지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다만 영신의 건강을 축수하는 것과, 새로 계획하는 일이나 방금 실지로 해나가는 일이 어떻다는 것만은 문체도 보지 않고 굵다란 글씨로 적어 보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영신은 그 편지를 틈틈이 꺼내 보는 것, 오직 그것만이 큰 위안거리였다.

그 동안 영신의 수입이라고는 경성연합회에서 백현경의 손을 거쳐 생활비 겸 사업을 보조하는 의미로 다달이 삼십 원씩 보내주는 것밖에 없었다.

원재 어머니라는 젊어서 홀로 된 교인의 집 건넌방에 들어서 밥값 팔 원만 내면 방세는 따로 내지 않았다. 옷이라고는 그곳 여자들과 똑같은 보병 것을 입고 겨울이면 학생 시대에 입던 헌 털 자켓 하나가 유일한 방한구인데 구두도 안 신고 고무신을 끌고 다니니, 통신비 신문 잡지 대금 해서 십여 원만 가지면 저 한 몸은 빠듯이 먹고 지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머지 이십 원도 못되는 돈으로 이태 전부터 강습소와 그밖에 모든 경비를 써 온 것이다. 월사금을 한 푼이라도 받기는커녕 그 중에도 어려운 아이들의 교과서와 연필 공책까지도 당해 주고, 심지어 넝마가 다 된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면 장에 가서 옷감까지 끊어다가 소문 안 나게 해 입힌 것이 한두 벌이 아니었다.

더구나 아이들이 장난을 하다가 다치거나 배탈이 나든지 하면 으레 '선생님'을 부르며 달려오고 나중에는 동네 사람들까지 영신을 무슨 고명한 의사로 아는지,

“채 선생님, 제 둘째 새끼가 복학을 앓는뎁쇼, 신효한 약이 없습니까?”

하고 찾아와서 손길을 마주 비비는 사람에,

“아이구, 우리 딸년이 관격이 돼서 자반 뒤집기를 하는데, 제발 적선에 어떻게 좀 살려줍쇼.”

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얼굴도 모르는 여편네에, 낫으로 손가락을 베인 머슴에, 도끼로 발등을 찍힌 나무꾼 할 것 없이 급하면 채 선생을 찾아온다.

영신은 '이건 내가 성이 채가니까 옛날 채 동지가 여자로 태어난 줄 아우?' 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네들을 하나도 그대로 돌려보낼 수가 없어서 내복약도 주고 겉으로 치료도 해 주었다. 그러나 그 시간과 비용도 적지 않다. 붕대, 소독약, 옥도정기, 금계랍, 요도포름 할 것 없이 근자에는 한 달에 약품 값만 거의 십 원씩이나 들었다. 그래도 오히려 모자라는데, 그네들은 채 선생이 병만 잘 고칠 줄 아는 것 뿐 아니라, 화수분이나 가진 것처럼 돈도 뒷구멍으로 적지 아니 버는 줄 아는 모양이다.

보통 사람은 불러다 볼 생각도 못하는 공의가 그나마 사십 리 밖 읍내에 겨우 한 사람이 있고, 장거리에 의생이 두어 사람 있다고는 하나, 옛날처럼 교군이나 보내야 온다니, 이 근처 백성들은 무료로 치료를 해 주는 채 선생을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영신의 방이 어떤 때는 진찰실이 되고 벽장 속은 양약국의 약장 같았다. 나날이 명망이 높아가는 채 의사(?)는 병을 고쳐주는 데까지 재미가 나서 빚을 얻어가면서도 급한 때 쓰는 약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아메바 성 이질로 죽어가던 사람이 에메틴 주사 한 대로 뒤가 막히고, 가슴앓이로 펄펄 뛰던 사람이 판토폰 한 대에 진정이 되는 것은 여간 신기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자연히 통속적인 의학과 임상(臨床)에 관한 서책도 보게 되고 실지로 의사의 경험도 쌓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이 동리에 특파하신 사도(使徒)다!' 하는 자존심과 자랑까지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수술을 해야 할 환자를 몇 십리 밖에서 업고 오고, 심지어 보기에도 더럽고 지겨운 화류병 환자까지 와서 치료를 해 달라고 엎드려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데는 진땀이 났다. 그네들이 거절을 당하고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볼 때. '왜 내가 정작 의술을 배우지 못했던가' 하고 탄식을 할 때도 많았고 동시에 '의료 기관 하나 만들어 놓지를 않고, 세금을 받어다간 뭣에다 쓰는 거야. 의사란 놈들이 있대두 그저 돈에만 눈들이 번하지' 하고 몹시 분개하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영신은 이따금 재판장 노릇까지도 하게 된다. 아이들끼리 재그락거리는 싸움은 달래고 타이르고 하면 평정이 되지만 어른들의 싸움, 그 중에도 내외 싸움까지 판결을 내려 달라는 데는 기가 탁 막힐 노릇이었다.

어느 비오던 날은 딱정떼로 유명한 억쇠 어머니가 집에서 양주가 머리가 터지도록 싸우다가 영감장이의 멱살을 추켜쥐고, 영감장이는 마누라의 머리채를 꺼두르며, 씨근벌떡거리고 와서는,

“아이고 사람 죽겠네, 채 선생님. 이 경칠 놈의 영감을 어떡허면 튀전을 못하게 맨듭니까? 술 못 먹게 하는 약은 없습니까?”

하면, 영감장이는 만경이 된 눈을 휘번덕거리며,

“아이구 이 육실할 년, 버르쟁이를 좀 가르쳐줍쇼.”

하고 비가 줄줄 쏟아지는 진흙 마당에서 서로 껴안고 딩굴며 한바탕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버럭버럭 대드는 바람에, 영신은 어쩔 줄을 모르고 구경만 하다가 고만 뒷문으로 빠져서 예배당으로 뺑소니를 친 때도 있었다.

한편으로 글을 배우러 오는 아이들은 거의 날마다 늘었다. 양철 지붕에 송판으로 엉성하게 지은 조그만 예배당은 수리를 못해서 벽이 떨어지고 비만 오면 천정이 새는데, 선머슴 아이들이 뛰고 구르고 하여서 마루창까지 서너 군데나 빠졌다. 그것을 볼 때마다 늙은 장로는,

“흥, 경비는 날 곳이 없는데 너희들이 예배당을 아주 헐어내는구나. 강습이구 뭐구 인젠 넌덜머리가 난다.”

하고 허옇게 센 머리를 내둘렀다.

더구나 새로 글을 깨친 아이들이 어느 틈에 분필과 연필로 예배당 안팎에다가 게발개발 글씨도 쓰고 지저분하게 환도 친다.

'신통이 개자식이라' '갓난이는 오줌을 쌌다더라' 하고 제 동무의 욕을 쓰기도 하고, 심지어 십자가를 새긴 강당 정면에다가 나쁜 그림까지 몰래 그려 놓기도 하여서, 그런 낙서를 볼 때마다 장로와 전도사는 상을 찌푸린다.


영신은 여간 미안하지가 않아서 하루도 몇 번씩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입이 닳도록 타일렀다. 그러나 속으로는 제가 피땀을 흘리며 가르친 아이들이, 하나 둘씩 글눈을 떠가는 것이 여간 대견치 않았다. 비록 나쁜 그림을 그리고 욕을 쓸망정 그것이 여간 신통하지가 않아서,

“장로님, 저희두 따로 집을 짓구 나갈 테니 올 가을꺼정만 참아줍시요.”

하고 몇 번이나 용서를 빌었다. 그러면 변덕스러운 장로는 대머리를 어루만지며,

“원, 채 선생, 별 말씀을 다 하는구료.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겠지요. 그게 좀 거룩한 사업이요.”

하고 얼더듬는다. 그럴수록 영신은 삭월세집에 들어 있는 것만큼이나 불안스러워서 하루바삐 집을 짓고 나가려고 안해 보는 궁리가 없었다.

그러나 원체 가난한 동리인 데다가, 그나마 돈이 한창 마른 때라, 기부금은 적어 놓은 액수의 십분의 일도 걷히지를 않고, 친목계원들이 춘잠(春蠶)을 쳐서 한 장치에 열 서너 말씩이나 땄건만, 고치금이 사뭇 떨어져서 예산한 금액까지 되려면 어림도 없다. 닭도 집집마다 개량식으로 쳤지만 모이를 사서 먹인 것과 레그혼같은 서양 종자의 어미 닭 값을 따지고 보면 계란 값과 비겨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