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혁은 한참이나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서 창호지로 새로 바른 들창이, 석양에 눈이 부시도록 반사하는 회관을 쳐다보면서,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다가 회원들을 돌아다보며,
“우리, 낙성식도 못해서 피차에 섭섭한데, 그 대신 뭐 기념될 일이나 하나 해 볼까?”
하고 벌떡 일어선다.
“무슨 일요?”
하는 회원들의 얼굴에서는 '간신히 오늘 하루나 쉬려는데, 또 무슨 일을 하자누' 하는 표정을 역력히 읽을 수 있다.
“그저 괭이하고 삽하구만 들구서 나를 따라들 오게나.”
하고 동혁은 회관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이을 때에 쓰던 사닥다리를 둘러메더니, 산등성이를 넘는다. 회원들은 멋도 모르고 동혁의 뒤를 따랐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매미, 쓰르라미 소리도 점점 엷어질 무렵에는 회관 앞 마당이 턱 어울리도록 두 길 세 길이나 되는 나무가 섰다. 전나무, 향나무, 사철나무 같은 겨울에도 잎사귀가 떨어지지 않는 교목(喬木)만 골라서 '봄이나 가을에 심어야 잘 산다'고 고집을 하는 회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다가 옮겨 심은 것이다. 그것은 동혁이가 근처를 돌아다니며 미리 보아 두었다가, 나무 주인에게 파다 심을 교섭까지 해 두었던 싱싱한 나무들이었다.
새로운 회관에 들게 되는 날 아침에 동혁이가 부는 나팔 소리는 더한층 새되고 씩씩하였다. 조기 회원들이,
“엇둘! 엇둘”
하고 체조를 하는 소리도, 애향가의 합창도, 전날보다 곱절이나 우렁찬 것 같았다.
새 집을 구경도 할 겸, 새로 닦아 놓은 운동장에서 체조를 하는 바람에, 그동안 게으름을 부리던 조기회원들도 전부 다 오고, 타동에서 온 구경꾼도 오륙십 명이나 되어서, 운동장이 빽빽하게 찼다.
오늘은 영신이가 조직해 주고 간 부인근로회의 회원들도, 십여 명이나 건배의 아내를 따라서 참례를 하였다. 아무에게도 낙성식을 한다고 광고를 한 것도 아니요, 건배는 무슨 일이든지 크게 버르집고 뒤떠들려고만 든다고, 동혁이와 의견 충돌까지 되었지만 오늘 아침만은 누구나 은연 중에 농우회관에 낙성식을 거행하는 기분으로 모인 것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은 평소와 같이 조기회가 끝난 뒤에도 헤어지기가 섭섭한 듯이 어정버정하며 동혁을 바라본다. 그 눈치를 챈 건배는,
“여보게, 회원도 더 모집해야 할 텐데, 여러 사람이 모인 김에 연설 한 마디 하게그려.”
하고 동혁의 옆구리를 찌른다.
“그건 선전부장이 할 일이지, 왜 나더러 하라나?”
하고 동혁이가 사양을 하니까, 건배는 그 말을 못들은 체하고 회관 정문 앞에 나서더니,
“여러분,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지금 이 회관을 짓자고 맨 먼저 발설을 했고, 우리들을 헌신적으로 지도해 주는 박동혁군이 여러분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고 공포를 하고 나서는 '인젠 말을 하든지 말든지 나는 모른다' 는 듯이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선다. 운동장에서는 박수소리가 일어났다. 동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너 어디 두고 보자'는 듯이 건배의 뒤통수를 흘겨보고는 회원들의 앞으로 나섰다.
엄숙한 태도로 여러 사람들의 긴장된 얼굴을 둘러보다가,
“준비 없는 말씀을 드리게 됐습니다.”
하고 한 마디 하고 나서, 등뒤의 회관을 가리키며,
“이만한 집 한 채를 얽어 놓은 것이 결코 자랑할 거리는 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이 집을 지으려고 여러 해를 두고 별러 오다가, 오늘에야 낙성을 하게 된 것을 여러분도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다만 한 가지 자랑하고 싶은 것은, 이 집은 연재가락 하나 짚 한 단까지도 회원들이 가져온 것이요, 목수나 미장이 한 사람 대지 않고, 우리가 이 염천에 웃통을 벗어부치고 불개미처럼, 참 정말 불개미처럼 두 달 동안이나 일을 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만한 집 한 채나마 우리 한곡리 한복판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집은 농우회원 열 두 사람의 집이 아니요, 여러분이 유익하게 이용하시기 위해서 지어 놓은 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한곡리의 공청, 즉 공회당으로 써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잠깐 눈을 내리감았다가, 얼굴을 들고 소리를 높여,
“여러분! 여러분은 이 말 한마디만 머리 속에 깊이 새겨두십시오. '여러 사람들이 한맘 한뜻으로 그 힘을 한 곳에 모으기만 하면, 어떠한 일이든지 이루어질 수가 있다'는 것을 - 우리는 여름내 땀을 흘린 그 값으로 이 신념 하나를 얻었습니다. 처음으로 귀중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보다 더 많은 사람이 똑같은 목적으로 모여서, 꾸준히 힘을 써 나간다면, 이보다 더 어려운 일도 성공할 수가 있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여러분과 함께 믿고자 하는 바입니다.”
하고 부르짖고는 숨을 돌린 뒤에 목소리를 떨어뜨려,
“우리는 일을 크게 버르집고 겉으로 떠들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낙성식같은 것도 하지를 않습니다마는 그대신 우리 동리 여러분께 좋은 음악을 들려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집터를 닦는 달구질 소리, 마치질, 자귀질 하는 소리가 온 동리에 울리지 않았습니까? 저 소대갈산까지 찌렁찌렁 울리지 않았습니까?
그 소리가 무엇보다 훌륭한 음악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을 무너버리고 깨뜨려 버리는 파괴의 소리가 아니라, 새로 짓고 일으켜 세우는 건설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소리가 어찌나 반갑고 기쁜지, 조금도 괴로운 줄을 모르고 일을 했습니다.”
동혁은 그 말에 매우 감격해 하는 여러 사람의 얼굴을 둘러보다가,
“여러분, 이 집이 터지도록 우리의 장래의 일꾼들을 보내주십시오! 아침저녁으로 글 배우는 소리가 그칠 때가 없도록 해 주십시오! 이 집이 꽉 차면 우리는 이 집보다 더 큰 집, 또 그보다도 더 굉장히 큰 집을 짓겠습니다.”
그 말에 회원들은 손바닥이 뜨겁도록 박수를 한다.
그때에 건배는 여러 사람의 앞으로 썩 나서면서,
“한곡리 만세!”
하고 두 팔을 번쩍 쳐든다.
“만세!”
여러 사람이 고함지르듯 하는 만세 소리에 새로 심은 사철나무에 앉았던 참새들이 깜짝 놀라 푸르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