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신이가 떠나기로 작정한 전날 밤은, 달이 유난히 밝았다. 열 나흗날 달이, 어지간히 기운 것을 보니 자정도 가까운 듯. 다른 사람들은 초저녁에 다 와서 작별을 하고 갔고, 건배의 아낙은 영신이가 친정에나 왔다가 가는 것처럼, 수수엿을 다 고아 가지고 와서 눈물로 작별을 하고 갔건만, 동혁이만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점심 때 집에 볼 일이 있다고 잠깐 다녀는 갔으나, 동화의 말을 들으면 집에는 종일 들어오지를 않았다고 한다. 영신은 '한 마디래두 꼭 하구 가야만 할 말이 있는데' 하고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눈을 까맣게 기다리다가 '내일 아침에야 일찌감치 오겠지'하고 누웠었다.

서창을 물들이는 달빛은, 이런 걱정 저런 근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영신을 문 밖으로 꾀어 내었다. 그는 바스켓 속에 감추고 왔던 조그만 손풍금을 꺼냈다. 그것은 - 여고보를 우등 첫째로 졸업한 기념으로 미스 빌링스란 서양 여자가 선사한 것이다.

영신이가 이곳에 온 뒤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거닐던 바닷가 백사장에는, 하아얀 모래가 유리가루처럼 반짝이는데, 그 모래를 밟으면 바삭바삭 소리가 난다. 옷 속으로 스며드는 밤기운이 조금 선선하기는 하나 바람 한 점 일지를 않는다.

영신은 외로운 그림자를 이끌며 가만가만히 손풍금을 뜯으면서 그 모래 위를 거닐려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노래가 저절로 입을 새어 나왔다. 그 노래는 드리고의 「세레나아데(小夜曲)」였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찬송가나 동요 같은 노래 이외에 애틋한 사랑을 읊은 노래라든가, 조금이라도 유흥 기분이 떠도는 유행창가는 귀에 익도록 들으면서도 입밖에 내기는 삼가 왔었다. 그러던 것이 오늘 저녁은 즉흥적으로 드리고나 슈베르트 같은 작곡가의 애련한 영탄적(詠嘆的)인 노래가 줄달아 불러졌다.

처음에는 입 속으로만 군소리하듯 불러보던 것이 차츰차츰 그 소리가 높아져서 무섭도록 고요한 깊은 밤 해변의 적막을 깨뜨리다가는 가느다랗게 뽑아올리고 뽑아내리는 피아니시모에 영신은 '내가 성악가나 될 걸 그랬어' 하리만큼 제 목소리가 오늘 저녁만은 은실같이 곱고 꾀꼬리 소리만큼 청아한 듯이 제 귀에 들렸다.



머리를 들면 황금 가루 같은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머리를 숙이면 그 달빛을 실은 물결이 천 조각 만 조각으로 부서지며, 눈과 영혼을 함께 황홀케 한다.

다시금 머리를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풀솜 같은 구름 속으로 숨박꼭질을 하는 달 속에는 쓸쓸한 방구석에 홀로 누워 외딸을 그리는 어머니의 눈물에 젖은 얼굴이 비치는 것 같고, 기다란 한숨과 함께 머리를 떨어뜨리면 닦아 놓은 거울 같은 바다 위에 꿈에도 잊히지 못하는 고향 산천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영신은 백사장에 펄썩 주저앉으며 눈을 꽉 감았다. 이번에는 무형한 그 무엇이 젖가슴으로 치밀어 오른다.

'아이, 내가 왜 이럴까?' 하고 제 마음을 의심도 해 보았다. 이제까지 참고 눌러 왔던 청춘의 오뇌에 온몸이 사로잡히자 영신의 떨리는 입술에서 터져나오는 한 마디는 '하나님, 제가 그이를 사랑해도 좋습니까?' 하는 독백(獨白)이었다. 영신은 다시 부르짖듯이 신앙의 대상자에게 호소한다.

'하나님, 일과 사랑과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택해 주시옵소서. 저의 족속의 불행을 건지기 위해서 이 한 몸을 바치겠다고 당신께 맹세한 저로서는, 지금 두 가지 길을 함께 밟을 수가 없는 처지에 부딪쳤습니다. 오오, 그러나 하나님, 저는 그 두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를 버릴 수도 없습니다'

영신은 모래 위에 폭 엎드러졌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에 번지는 모래를 으스러지라고 한 움큼 움켜쥐고서….

어디서 무엇에 놀라서 날아가는지 물새 한 마리가 젖을 보채는 어린애처럼 삐액삐액하고 울면서 머리 위를 지나간다.

영신은 고독과 적막이 서리를 끼얹는 듯해서 진저리를 치고는 발딱 일어나면서, 치맛자락의 모래를 활활 털었다. 그 외롭고 적적한 생각을 잠시라도 헤쳐 버리려고 곁에 동댕이를 쳤던 손풍금을 다시 집어들고 감흥에 맡겨 열 손가락을 놀리며 저도 모를 곡조를 한바탕 뜯었다.

누가 곁에 있어서 그 음보(音譜)를 그대로 오선지에 기록하였다면, 혹시 「항가리인의 광상곡(狂想曲)」같은 작품이 이루어졌을는지도 모르리라. 그는 풍금 타던 손을 쉬고 다시금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그때였다.

바로 영신의 등 뒤의 솟은 바위 위에서 시꺼먼 그림자가 괴물과 같이 나타나더니,

“저…그 곡조 한 번만 더 타 주세요!”

하는 굵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깜짝야!”

영신은 두 손을 짝 벌리고, 오금에 용수철이나 달린 듯이 발딱 일어섰다. 전신에서 소름이 쭉 끼쳤다. 달빛을 정면으로 받아 시꺼먼 그림자의 정체가 드러나자,

“난 누구라구요. 어쩌면 그렇게 사람을 놀래세요?”

영신은 반가움과 원망스러움에 반죽이 된 표정으로 동혁을 살짝 흘겨본다.

동혁은 빙긋 웃으며 저벅저벅 걸어서 영신의 앞에 와 선다.

“놀라긴 내가 정말 놀랬어요. 이 밤중에 어디로 가셨나 허구, 빈 방 속에서 한참이나 기다렸었는데…”

“풍금 소릴 들으시구 여기 있는 줄 아셨군요?”

“네, 독창회에 방해가 될까 봐 저 바위 그늘에서 입장권도 안 사고 근청을 했지요.”

그 말에, 대낮 같으면 영신의 얼굴이 석류처럼 빨개진 것을 볼 수 있었으리라. 잠시 이성(理性)을 잃었던 모든 동작과, 미쳐 날듯이 목청껏 부른 노래를 동혁이가 지척에서 보고 들은 생각을 하고 열적고 부끄러워 영신이가 얼굴을 붉힌 것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