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방 전 해꺼정 금부(禁府)의 도사(都事)라는 벼슬을 다녔다나요.”
“금부라뇨?”
“지금으로 치면 경무국쯤 되겠는데, 도사란건 경부 같은 거래요. 아뭏든 그 늙은이는 여태 노루 꼬리만한 상투를 달고 체수는 조그만히, 빠주한 노랑수염을 쓰다듬으며 도사리구 앉아서, 에헴에헴 헛기침을 하면서 위엄을 부리는 게 여불 없는 염소지요. 한데 체격은 고 모양이래두 목구멍 하나는 크거던요.
한참 망해 들어가는 판에 부자들이나 장사치를 사뭇 도둑놈으로 몰아서 옭아다가는 주리를 틀구 기와 꿇림을 시켜서, 박박 긁어모아 이 고장에 전장(田庄)을 장만해 가지구 내려왔대요. 내려와서 심심하다구 돈놀이를 하구 장리 벼를 놔서, 이 근동에서 강도사의 돈을 안 얻어 쓴 사람이 하나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멀쩡한 고리가시(고리대금업자)로군요.”
“고리가시구말구요. 그 취리하는 법이나 장리 벼를 놔먹는 수단이 알구 보면 기막히지요. 그런데 근자엔 '이젠 이 세상에 더 두구 볼 게 없다'구 매일 술로만 장복하다가, 간이 뚱뚱 부었다나요. 그래서 살림두 기천(基千)이란 큰아들한테 내맡기구선 꼼짝 못하구 누웠대요.”
“그래 저 오입장이 같은 사람이, 그 늙은이의 둘째 아들이군요?”
“저 기만이라는 인물만은 그래두 해외바람을 쏘여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걸 짐작은 하는지 제 딴엔 우리가 하는 일을 찬성두 하고 추렴두 몇 곱절이나 내는데…”
“그런 사람을 잘 이용하면 좋지 않아요? 가끔 기부금이나 뜯어 오구요…청석골 근처에두 대학이니 전문학교니 졸업을 하구 와서, 저 건살포 모양으로 번들번들 놀면서, 장거리로 술추렴이나 다니는 사람이 서넛이나 돼요. 우리가 하는 일을 헤살이나 놀지 말았으면 할 뿐이지, 그 따위 고등 유민들한테 기대하는 건 없지만요. 논밭 팔아가며 공부한 청년들이 다 그 뻔새로 건공중에 떠돌아다니는 걸 보면 여간 한심하지가 않아요.”
하는데, 기만이가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방향으로 그 백납같이 흰 얼굴을 들고 어슬렁거리고 올라온다. 아마 영신이와 인사를 청하려고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스운 일이 많지요. 저 사람이 첨엔 자꾸만 우리 회엘 들겠다구 하니까, 동혁의 말이 '어느 시기까지는 누구나 다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구 찬성을 해서 입회를 시켰더니, 얼마 동안은 '나두 상일을 해 보겠다'구 제딴엔 열심으로 따라댕겼는데…”
“그래서…”
“저의 부형은 양반의 체면을 더럽히는 미친 자식이라구 야단을 치다 못해, 아주 내버려두게까지 됐었어요. 장에서 사온 괭이를 번쩍거리며 그루를 가는데 덤벼들어서 하룻동안 덥적거리더니 이튿날은 고만 몸살이 나서 한 댓새나 된통으로 앓았대요. 저의 집에선 이거 생자식 잡겠다구 자동차를 '가시끼리'해서 읍내의 공의를 다 불러오구 한참 야단법석을 했에요.”
“참 정말 혼이 났군요.”
“그뿐이면 좋게요. 저의 집 앞 채마전에서 한 반나절만 꿈지럭거리면, 그날 밤엔 행랑계집들을 불러다가 '다리를 주물러라' '허리를 밟아라' 하구 죽는 시늉을 한대요. 그나 그뿐인가요, '나도 농군들이 단꿀 빨듯하는 걸 먹어야 한다'구 머슴들이 두레를 놀던 이월 초하룻날은, 지푸라기를 꽂아두 안 넘어가는 그 텁텁한 수수막걸리를 두 사발이나 들이키군 그만 배탈이 나서 한 사날동안이나 설사를…”
하는데 영신은 웃음을 참다 못해서,
“고만요, 고마안.”
하고 허리를 잡으며 손을 내젓는다. 건배의 수다에는 또다시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동혁은, 기만이가 올라가는 것을 보자 앞질러 두 사람이 앉은 데로 올라왔다.
“자, 그만 우리집으로 내려갑시다.”
하는데, 기만이는 살포자루를 내두르며 뒤미처 올라왔다.
기만은 세 사람이 내려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동혁이더러 소개를 해 달래서 영신이와 인사를 했다. 이는 영신이가 초면이었지만 M대학 정경과(政經科)의 졸업 논문을 쓰다가, 신경쇠약에 걸려서 나왔다는 것과 별안간 궁벽한 이 시골서 지내려니 갑갑해서 죽겠다는 것과, 그러나 이러한 동지들이 있어서 함께 일을 하니까 여간 의미 깊은 생활이 아니라고, 일본말 조선말 반죽으로 건배의 다음 결은 갈 만큼 씩둑꺽둑 늘어놓는다.
영신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그러세요? 네 그러시구 말구요.”
하고 말대꾸를 해준다. 동지라는 말만 해도 귀에 거친데, 함께 일까지 한다는 데는 우습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 응달에서만 지내서 하얀 살결과 안경 속에서 사람을 깔보는 듯한 조그만 눈동자며, 삶아 놓은 게발같이 가냘픈 손가락을 보니 어쩐지 말대답을 하기도 싫었다. 더구나 옥색 명주저고리를 입은 것과 회색 부사견 바지를, 또 구두가 덮이도록 사북을 처뜨려 입은 것이 바로 보기 싫을 만큼이나 눈꼴이 틀렸다.
기만은 안보는 체하면서도 영신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심심하신데 우리집으로 놀러 가시지요.”
하면서 동혁을 돌아다보고,
“우리 동지끼리 저녁이나 같이 먹으면서 좋은 얘기나 듣고 싶은데…”
하고 양해를 구한다. 그는 영신이가 먼 데 찾아온 귀한 손님이라고 대접을 하려는 것보다도, 몸이 비비 틀리도록 심심한 판에 동리에 처음으로 떠들어 온 신여성을 불러다 놓고 하루 저녁 소견이나 하고 싶은 눈치다.
제가 거처하는 작은 사랑채를 말끔 중창을 하고 유리를 붙이고 실내를 동경(東京)같은 데의 찻집을 본 따서, 모던으로 꾸며 놓은 것과, 또는 새로 사온 유성기를 틀면서 '이 시골구석에도 이만큼 문화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듯, 또 한편으로는 몇 해를 두고 이혼을 못해서 죽느니 사느니 하던 본처를 월전에 쫓아보내서 영신이 같은 여자를 저의 집으로 한번 끌고 들어가 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혁이가 얼른 말대답을 아니하는 것을 보고, 영신은,
“오늘 저녁은 저 동혁씨 댁으로 가기로 먼저 약속을 했습니다.”
하고 두말 못하게 똑 잡아떼었다. 기만은 자존심을 상한 듯,
“그럼 여러 날 계실 테니까, 일간 다시 한번 청하지요.”
하고 머리를 까딱해 보이더니 무색해서 내려간다.
“난 우리 집에까지 따라 내려올 줄 알았더니…제가 하릴없는 생각만 하구, 줄줄 따라 댕기는 덴 학질이야.”
하고 동혁은 앞을 섰다. 건배는 휘적거리고 동혁의 뒤를 따라 오다 말고 멋적은 듯이,
“여보게 약국의 감초두 빠질 차롄가?”
하고 일부러 돌아서는 체를 한다.
“압따, 이 사람 화젓가락 웃마디 꼬듯 하지 말구, 어서 사발농사나 지러 오게 그려.”
하고 동혁은 건배를 돌아다보고 손짓을 한다.
세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은행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어쩌면 인사를 하자마자 대뜸 저의 집으로 가재요?”
“그러니깐 자제가 노새지요.”
동혁도 영신을 돌아다보며 웃다가,
“그 사람은 문제가 없에요. 잘 구슬러주기만 하면 고만이니까. 하지만 기천이라는 그 형 때문에 큰 걱정이예요. 우리 일엔 덮어놓구서 반대니까요. 반대만 하면 좋겠는데, 머리악을 쓰고 훼방을 놀아서 마구 대들어 싸울 수두 없구, 큰 두통거린걸요.”
하고는 쩍하고 입맛을 다신다. 영신이가,
“형은 뭘 하는 사람인데요?”
하니까, 입이 궁금하던 건배가 다가서며,
“대대로 곱사등이라구, 그 자두 고리대금을 하지 뭘해 먹겠에요. 여러 해 면서기를 댕기다가, 요샌 명정거리나 장만을 하려는지 면협의원을 선거하는데 출마를 했다나요. 저의 아버지버덤두 더 옹졸맞게 생겨먹은 게, 얼리지 않는 양복을 빼지르고 자전거를 타구서 유권자를 찾아 댕기는 화상이란 참 장관이지요.”
“그런데 무슨 까닭으루 청년들이 하는 일을 반대하는 건가요.”
하고 영신이가 묻는데, 어느덧 동혁의 집앞까지 당도하였다. 동혁의 어머니는 싸리문 밖으로 내달으며,
“어서 오우.”
하고 여러 해 봐 오던 사람처럼, 영신을 반가이 맞아들인다. 그는 치마를 갈아입고 새 버선까지 꺼내 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