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혁은 저의 집의 가난한 살림살이를 영신에게 보여 주기가 싫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어머니나 아버지나, 동네 사람들이 자기네 짐작대로 영신을 저의 색시 감으로 알고 놀리기까지 하는 것이 싫어서, 저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를 꺼렸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얘야, 좀 가까이 보자꾸나. 먼 광으루만 보구 어디 알 수 있니? 색시 감을 서넛째나 퇴짜를 놓더니만, 연분이 따로 있는 줄이야 누가 알았겠니? 의뭉스레 굴지 말구, 저녁엔 꼭 데리구 오너라.”
하고 아들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며느리 감을 데리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사실 정분이, 차순이, 필례 할 것 없이 동네의 색시들은 동혁이를 믿고 있는데, 당자가 아직 장가를 안 들겠다고 쇠고집을 세워서 다른 데로 혼인을 한 뒤에, 벌써 아들딸들을 낳고 사는 중이다.
근동에서도 여러 군데서 통혼이 들어왔건만, 아무리 사윗감을 탐을 내어도 '글쎄 갓 서른까진 장가를 안 든다니까…암만 해 보구려' 하고 막무가내로 말을 안 들어 왔다. 어제 저녁에는 동화도 형과 겸상을 해서 밥을 폭폭 퍼넣다가,
“성님, 사람이 썩 무던해 뵈는데…쇠뿔두 단결에 빼랬다우, 그 덕에 나두 장가나 들어봅시다.”
하고 뒤퉁그러진 소리를 해서, 형은,
“너두 날 놀리는 셈이냐? 그렇게 급한데 누가 너 먼점 장가를 들지 말라든.”
하고 씁쓸히 웃었다.
한편으로 영신이도 동혁의 생활이 보고 싶었다. 오래 두고 머리 속에 그려보던 것과 같은가 또는 얼마나 틀릴까 - 하고 적지 아니 궁금히 여기다가 동혁이가 거처하는 방으로 들어가서 둘러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차한 살림이요, 더구나 홀아비라 번쩍거리는 세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문학교까지 다니던 사람이 거처하는 방으로는 너무나 검소하다. 흙바닥에다가 그냥 기직대기를 깔았는데, 눈에 새뜻하게 띠는 거라고는 하나도 없다.
웃목에 놓인 책상에는 학교에 다닐 때 쓰던 노오트 몇 권이 꽂혔고, 신문 잡지가 흐트러졌을 뿐이요, 아랫목에는 발길로 걷어차서 두르르 말아놓은 듯한 이불 한 채가 동그마니 놓였다. 참 한가지 잊어버린 것이 있다. 그것은 마분지로 도배를 한, 벽에 붙은 사기 등잔인데, 그것도 오늘 지나다니며 들여다본 다른 농가의 것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
무엇을 장하게 차리는 것도 아니나, 눈 어둔 어머니는 부엌 속에서 데그럭거리며 어둡도록 꾸물거린다. 조금 있자, 건배의 아낙이 달걀 한 꾸러미를 행주치마로 감추어 가지고 노인의 응원을 하러 왔다.
“그 색시 복성스럽게 생겼읍죠? 조금두 신식여자 티가 없구, 아주 서글서글헌게 속 터진 사내 같어서.”
하더니,
“이제야 부엌일을 면하시나 봅니다.”
하고 밥을 푸는 동혁의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번에두 김치국부텀 마시는 셈인지 누가 아나, 내 뱃속으로 낳았어두 당최 그놈의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있어야지. 내가 무슨 팔자에 살아 생전 그런 며느리를 얻어 보겠나.”
하고 마누라는 한숨을 내쉰다. 박 첨지와 동화는 자리를 내어 주느라고 마을을 갔는데 웃간에서 저녁을 기다리는 동안, 세 사람은 농촌문제를 토론하고, 요새 한참 떠들고 있는 자력갱생(自力更生) 운동을 비판하는데, 건배의 아낙이 밥상을 들고 들어온다.
“참 정말 미안하군요. 이렇게 여기꺼정 출장을 하셔서…”
하고 영신이가 일어나며 상을 받아 들었다. 동혁의 어머니가 문밖까지 따라와 눈을 찌긋하고 영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숫제 찬 없는 밥을 대접하신답시구… 온, 시골구석이라 뭐 있어야지. 늙은 사람이 한 거라구 숭을랑 보지 말구 많이 자슈.”
한다. 영신은 일어서며,
“온 천만의 말씀을 다 하십니다. 들어오세요.”
하고 공손히 예를 한다.
“괜찮소, 어서 자슈.”
하고 여전히 '허우'를 하니까, 영신은,
“말씀 낮춰 하세요.”
하고 정말 색시처럼 조심스러이 앉았다. 건배의 아낙은 남편을 보고,
“그런데 두 분이 얘기두 조용히 못하게시리, 뭣하러 줄줄 따라 댕기는 거요? 집에 가서 어린애나 봐 주지 않구.”
하니까,
“흥, 얻어먹으러 다니는 사람이 자리를 가려서야 되나.”
하고 건배는 소매를 걷으며 젓가락을 집는다.
영신은 매우 유쾌한 그날 그날을 보냈다.
날마다 동혁이가 부는 나팔소리가 들리기 전부터, 은행나무 밑으로 올라가서 조기회에 참례를 하였다.
“안직 힘드는 운동은 하지 말구 편히 쉬시지요.”
하고 동혁이가 말려도, 남에게 조금이라도 지는 것을 대기하는 영신은, 맨 뒷줄에 서서 끝까지 체조를 하고, 또는 여러 사람과 함께 애향가를 불렀다.
“얘, 동혁이한테 온 여학생이 체조를 다 한다더라.”
하는 소문이 퍼지자, 이삼일 동안에 조기회원이 부쩍 늘었다. 늙은이 여편네들 할 것 없이 모여들어서 무슨 구경이나 난 것처럼 운동장인 잔디밭이 빽빽하도록 들어차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네들은 운동군이 아니요, 구경군인 것은 물론이다.
“허, 이거 장꾼버덤 엿장수가 많다더니, 웬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드나.”
하면서도 건배는 여러 사람이 모인 김에,
“여러분, 조기회에 참가를 합시요. 아침 일찌기 일어나 운동을 한바탕 하면 정신이 깨끗해지구, 첫째 소화가 잘 됩니다.”
하고 구세군처럼 선전을 하다가,
“우린 밥이 너무 잘 내려서 걱정이라네.”
“체증이나 나거던 옴세.”
하고 빈정거리는 사람이 있어서, 건배는 아무 말 못하고 뒤통수만 긁었다.
영신은 농우회원들끼리만 모이는 일요회에도 방청을 하였다.
처음에는 뒷줄에 가 앉아서 남들이 하는 이야기만 들었으나 나중에는 건배의 동의와 만장의 찬성으로 밤늦도록 이야기할 언권을 얻어서 청석골에서 저 한 몸으로 분투하는 이야기며, 남의 강제나 또는 일종의 유행으로 하는 소위 농촌 운동과, 우리가 스스로 깨닫고 자발적으로 해야만 할 농촌 운동을 구별해 가면서, 그 성질을 밝히고 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남녀를 물론하고 뜻이 같은 사람끼리 단결할 필요와 언제나 서로 연락을 취하자는 부탁을 하였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자세히 기록하지 않으나, 영신의 말은 억양이 심해서 유창하지는 못해도 조리가 닿고 열이 있어서 농우회원들은 물론, 동혁이도 '그동안 고생도 많이 하구, 수양도 어지간히 했구나,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두 많은걸' 하고 속으로 혀를 빼물 정도였다.
건배의 아낙도 문 밖에서 동리 여편네들과 엿듣고는 매우 감동이 되어,
“여자두 저만큼이나 났어야 사내들한테 코큰 소리를 해 보지.”
하고 자기가 보통학교 졸업밖에 하지 못하고 시집이라고 와서 살림과 어린것들에게 얽매여, 늙어만 가는 것을 분하고 절통히 여겼다.
온 지 나흘 되는 날, 저녁에 영신은 건배의 아낙을 앞장세우고 동네에 말귀 알아들을 만한 여인네들을 그 집 마당에 모아 놓고 또 한번 일장 연설을 하였다.
“내가 이 한곡리에 와서, 며칠이라도 지내게 된 걸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이 동네에도 부인들끼리의 회를 하나 모아드리고 가겠습니다.”
하고 그런 모임을 조직할 필요를 역설하였다.
부인회를 모은대야, 그네들은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는 터이요, 남자들처럼 금주 단연을 하거나 도박 같은 것은 금할 필요도 없고 살림살이를 이 이상 더 조리 차려 해서 저축을 할 여지도 없지만, 당분간은 여자들의 글눈을 띠워주는 강습회 일만 하더라도 남자들의 힘을 빌지 말고 여자들끼리 자치를 해서, 지금부터 하루에 쌀 한 숟가락 보리 한 줌씩을 모아서라도 농한기에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그 경비를 써 나갈 것을 힘있게 말하였다.
마당 가득히 모인 여인네들은, 손 하나 들 줄은 모르면서도 모두 찬성한다는 뜻을 표하였다. 그래서 영신은 회(會)같은 것을 조직하는데 훈련을 받아 온 터이라, 건배의 아내를 회장 격으로 추천해서 '한곡리 부인근로회(漢谷里婦人勤勞會)'라는 단체 하나를 조직하였다.
그리고는 앞으로 유지해 나갈 방법까지 세워서, 건배의 아내에게 소상 분명히 일러 준 후, 그와 앞으로는 형님 동생을 하자고 해서 의형제까지 맺고 굳은 악수까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