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신이도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고목이 된 대추나무가 얼크러진 큰 마을 편을 바라본다. 옥색저고리를 입은 호리호리한 사나이가 안경을 번쩍거리며 기다란 살포를 지팡이 삼아 짚고, 언덕길을 어슬렁거리고 내려온다.



“살포는 감농이래두 할 줄 아는 사람이 물꼬나 보러 댕기는데 쓰는 건데요. 저 사람은 일년감이 열린 걸 보구 '거 감자 탐스럽게 열렸군' 하던 출신이, 살포를 건성 휘두르며 댕겨서 건살포라구 별명을 지었어요.”

입바른 소리 잘하는 동화의 대답이다.

“저 사람이 누군데요?”

영신은 새신랑처럼 옥색저고리를 입은 인물에게 호기심을 일으키며 물었다.


“형님한테 들으셨겠지요? 저 강도사집의 둘째 아들 기만(基萬)이에요. 동경 가서 어느 대학엘 댕기다가 무슨 공부를 그렇게 지독하게 했는지 신경 쇠약이 걸려 나왔다나요.”


“네, 그래요? 그럼 이 근처선 제일 공부를 많이 한 청년이로군요?”

“그런 셈이지요. 헌데 자제가 아주 노새에요.”

“아아니 노새가 뭐에요?”

하고 영신이가 재쳐 묻는 말에 동화는 무심결에 그런 말을 입밖에 내놓고는 말대답을 얼른 못하고 픽픽 웃기만 한다. 노새는 말과 당나귀 사이에 난 트기인 것은 알고 있으나 그 물건이 명색만 달랐지 생식은 못하는 동물이라는 것까지는 영신이가 모르고 있었다. 이 동리 청년들끼리 엇먹는 수작으로, 허울만 좋지 그저 아무짝에도 소용이 닿지 않는 인물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영신은 어렴폿이 기만이란 사람을 놀리는 말이거니 하고 더 묻지를 않았다.

기만이는 언덕에 살포를 꽂고 왼팔은 하느르르한 회색바지를 입은 허리춤에 찌르고 서서, 여러 사람이 일하는 것을 내려다보고 섰다. 무슨 풍경화나 감상하는 듯한 자세를 짓고 선 것이 몹시 아니꼬와 보여서 그것만 보아도 비위가 뒤집히는 듯,

“병이 났음네 허구 영계만 실컷 과 먹구 나니까 게트름이 나는 게지. 저 작자가 어슬렁거리구 댕기는 꼴은 뒀다가 봐두 눈꼴이 틀리더라.”

하고 동화는 저 혼자 투덜거린다. 곁에서 말둑을 박고 있던 형은,

“아서라, 오다가다 들을라. 귀먹은 욕두 그만큼 먹였으면 고만이지, 그렇게 원수 치부를 할 게야 뭐 있니. 제 딴엔 우리한테 하느라구 하는걸.”

하고 아우의 험구를 틀어막는다. 이번에는 건배가 영신의 곁으로 와서 바지에 흙탕물이 튀어서 말라붙은 것을 비벼 털면서 기만이가 앉은 언덕 위를 흘끔 쳐다보더니,

“그래두 저 사람은 돈밖에 모르는 저의 아버지나 형한테 대면, 없는 사람들을 꽤 동정하는 셈이에요. 이 논 닷 마지기를 우리한테 도지루 얻어주려구, 담배씨루 뒤웅박을 파려고 드는 제 형하구 쌈을 다 했으니까요. 겉탈인지 몰라두, 우리가 하는 일을 여간 찬성을 하지 않아요. 이따금 우릴 청해서 그 집엘 가는 날이면 이밥에 고기 반찬에 한턱 잘 먹여서 소복을 단단히 하고 나오는데, 저 동화하군 아주 옹추거든요.

술만 먹으면 '요새 세상에 양반이 무슨 곤장을 맞을 양반이냐!'구 들이대기를 일쑤하는데 그뿐이면 좋게요, 실컷 얻어먹구 나선 들어보라는 듯이 하는 소리가 '제에길, 요까짓 걸루 어름어름 우리 비위를 맞출려구, 몇 해를 두고서 저희가 우리를 빨아먹은 게 얼만데… 그걸 다 토해 놓으려면 아직 신날두 안 꼬았다'하구 건주정을 한바탕씩 하니 누가 듣기 좋다나요. 저 사람도 동화라면 딱 질색이언만 그럴수록 극성맞게 쫓아다니며 성화를 바쳐서 아주 학질을 떼지요, 여간한 심술패기라야지…”

“그렇게 혈기 있는 청년두 있어야 해요. 급할 때면 그런 사람이 앞잡이 노릇을 하니깐요.”

하고 영신은 동화가 멀찌감치 서 있는 것을 보고 칭찬 비슷이 하고는,

“그런데 여긴 지금두 양반 상놈이 있나요?”

하고 묻는데, 어느 틈에 기만이가 언덕을 내려와서 영신이가 앉은 맞은편 논둑에 가 버티고 섰다. 여학생이 동혁이를 찾아왔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구경을 하려고 나왔는지도 모른다. 기만이 가 가까이 오자 동혁의 형제는 못 본 체하고 돌아섰는데, 일하던 사람 중의 반수 이상은 그 앞으로 가서 허리를 굽히고,


“구경 나오셨시유?”

 

하고 손길을 마주 비빈다. 그들은 강도사집의 작인들이나 아니면 돈을 얻어 쓴 사람의 자질들인 것이다.

기만이는 바지춤에 손을 찌른 채 여러 사람이 인사를 하는대로,

“응, 응.”


하고 코대답을 할뿐이다. 논 귀퉁이에다가 살포를 꽂고 우두커니 섰다가 석돌이란 회원을 손짓을 해서 부른다. 영신의 편으로 눈짓을 하며, 수근거리는 것이 '저게 동혁이를 찾아온 여자냐'고 묻는 눈치다. 석돌이는 말대답하기가 거북한 듯이 고개만 끄덕여 보이다가 일자리로 돌아간다.

영신이는 기만이가 맞은편에서 안경 너머로 똑바로 건너다보고 섰는 것이 면구스러워서,

“난 저리루 거닐다 오겠어요.”

하고 일어선다.

“나 하던 일은 다 했는데, 혼자 다니시다 길이나 잊어버리시게요?”

하고 건배가 뒤를 대선다.

동혁은 책임상 일이 다 끝나기 전에는 일어서기가 어려운 모양인데, 영신이 혼자 돌아다니게 내버려두기도 안됐고 하던 이야기도 남아서, 건배는 입이 궁금하였던 것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기만이 등뒤로 돌아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논과 밭이 눈앞에 질펀히 깔렸는데 여기저기서 두레로 물을 푸는 소리와 소 모는 소리가 들린다. 한 서너 군데서나 못자리를 만드느라고 흰옷 입은 농군들이 손을 부지런히 놀리는 것이 보인다.

영신은 바위 틈에 홀로 피었다가 이우는 진달래 잎새를 어루만져 주다가,

“참, 아까 양반 얘길 하다가 중도무이를 했죠.”

하고 먼저 말을 꺼내더니,

“그런데 저 기만이란 사람의 아버지, 무슨 도산가 하는 이는 뭘하는 사람이야요?”

하며 잔디 위에 손수건을 깔고 앉는다.

남들이 다 벗고 들어서서 일을 하는데, 저 혼자 외톨로 돌아다니며 구경하듯 하기가 미안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료하기도해서 이 말 저 말 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