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랑도 뒤를 따른다. 김랑은 법당 문 밖에 나서자, 보퉁이 하나를 집어 들고 사뿐사뿐 조신의 뒤를 따라서 대문 밖에를 나섰다. 지새는 달이 산머리에 걸려 있었다.

“그 보퉁이는 무엇입니까?”하고 조신은 누구 보는 사람이나 없는가 하고 사방을 돌아보면서,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묻는다.

김랑도 나무 그늘에 들어와서 조신의 옆에 착 붙어서며, 보퉁이를 들어서 조신에게 주며, “우리들이 일평생 먹고 입고 살 것.”하고 방그레 웃는다.

조신은 그 보퉁이를 받아든다. 무겁다.

“이게 무엇인데 이렇게 무거워요?”

“은과 금과 옥과 자, 어서 달아나요. 누가 따라 나오지나 않나 원, 사령들 중에는 말보다도 걸음을 잘 걷는 사람이 있어요 - 자, 어서 가요. 어디로든지.”

조신이 앞서서 걷는다.

늦은 봄이라 하여도 새벽 바람은 추웠다.

“어서 이 고을 지경은 떠나야.”하고 김랑은 뒤에서 재촉하였다.

“소승이야 하루 일백 오십 리 길은 걷지마는 아가씨야…”

“제 걱정은 마셔요. 시님 가시는 데면 어디든지 얼마든지 따라갈 테야요.”

두 사람은 동구 밖에 나섰다. 여기서부터는 큰 길이어서 나무 그림자도 없었다. 달빛과 산 그늘이 서로 어울어지고 풀에는 이슬이 있었다.

“이 머리를 어떡허나?”하고 조신은 밍숭밍숭한 제 머리를 만져보았다.

“송낙이라도 뜯어서 쓰시지.”하고 김랑도 걱정스러운 듯이 조신의 찌그러진 머리를 보았다.

“아무리 송낙을 쓰기로니 머리가 자라기 전에야 중인 것을 어떻게 감추겠습니까?”

“그러면 나도 머리를 깎을까요?”하고 김랑은 두 귀 밑에 속발한 검은 머리를 만져본다.

“그러하더라도 남승과 여승이 단둘이서 함께 다니는 법은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중이 처녀 데리고 다닌다는 것보다는 낫지요.”

“그럼, 이렇게 할까요? 나도 머리를 깎고 남복을 하면 상좌가 아니되오.”

“이렇게 어여쁜 남자가 어디 있겠소?”

두 사람의 말에서는 점점 경어가 줄어든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나는 머리를 깎지 말고 시님의 누이동생이라고 합시다.”

“누이라면 얼굴이 비슷해야지, 나같이 찌그러지고 시커먼 사내에게 어떻게 아가씨 같은 희고 아름다운 누이가 있겠소.”

“그러면 외사촌 누이라고 할까?”

“외사촌이라도 조금은 닮은 구석이 있어야지.”

“그러면 어떻게 하나?”

“벌써 동이 트네. 해뜨기 전 어디 가서 숨어야 할 텐데.”

“글쎄요. 뒤에 누가 따르지나 않나 원.”

두 사람은 잠깐 걸음을 멈추고 온 길을 돌아본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하고 조신이 다시 말을 내인다.

“어떻게요?”하고 김랑이 한걸음 가까이 와서 조신의 손을 잡는다.

“아가씨를 소승의 출가 전 상전의 따님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아가씨 팔자가 기박하여 어려서 집을 떠나서 부모 모르게 길러야 된다고 하여서, 소승이 모시고 어느 절에 가서 아가씨를 기르다가 이제 서울 댁으로 모시고 간다고 그럽시다. 그러면 감쪽 같지 않소?”

“황송도 해라 종이라니?”

“아무려나 오늘은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이제는 먼동이 훤히 텃으니, 산속에 들어가 숨었다가 햇발이나 많이 올라오거든 인가를 찾아갑시다. 첫새벽에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도망꾼이로 알지 아니하겠소?”


“시님은 지혜도 많으시오. 오래 도를 닦으셨기에 그렇게 지혜가 많으시지.”하고 김랑은 웃었다.

조신은 김랑의 말에 부끄러웠다. 그러나 평생 소원이요, 죽기로써 얻기를 맹세하였던 김랑을 이제는 내 것을 만들었다 하는 기쁨이 더욱 컸다.

두 사람은 길을 버리고 산골짜기로 들었다. 아직 풀이 자라지 아니하여서 몸을 감출 수 없는 것이 안타까왔다.

“아가씨, 다리 아니 아프시오?”

“다리가 아파요.”
“그럼 어떡허나? 이 보퉁이를 드시오, 그리고 내게 업히시오.”

“아이, 숭해라. 그냥 가세요.”

두 사람은 한정 없이 올라갔다. 아무리 올라가도 동해 바다가 보이고 산 밑으로 통한 길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만하면 꽤 깊이 들어왔는데.”하고 조신은 돌아서서 앞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는 오르지 아니하였다. 다만 동쪽 바다에 가까운 구름이 누르스름하게 물이 들기 시작하였을 뿐이다.

“이제 고만 가요.”

“아직도 길이 보이는데.”

“그래도 더 못 가겠어요.”하고 김랑은 몸을 못 가누는 듯이 젖은 바위에 쓰러지듯이 앉는다.

“조금만 더 올라갑시다. 이 물줄기가 꽤 큰 것을 보니 골짜기가 깊을 것 같소. 길에서 안 보일 만한 데 들어가서 쉬입시다.”

“아이, 다리를 못 옮겨놓겠는데.”

“그럼, 내게 업히시오.”하고 조신은 김랑에게로 등을 돌려댄다.

“그러기로 그 보퉁이도 무거울 터인데 나꺼정 업고 어떻게 산길을 가시랴오?”

“그래도 어서 업히시오. 소승은 산길에 익어서 평지길이나 다름이 없으니 자, 어서.”

김랑은 조신의 등에 업혔다. 어린애 모양으로 두 팔로 조신의 어깨를 꼭 잡고 뺨을 조신의 등에 닿였다.

조신은 평생 처음으로 여자의 몸에 몸을 닿인 것이다. 비록 옷 입은 위라 하더라도 김랑의 부드럽고 따뜻한 살 기운을 감촉할 수가 있는 것 같았다.

조신은 김랑을 업은 것이 기쁘고 또 보퉁이의 무거운 것이 기뻤다. 그는 한참 동안 몸이 더 가벼워진 듯하여서 성큼성큼 시내를 끼고 올라갔다. 천리라도 만리라도 갈 수 있는 것만 같았다.

이따금 짐승이 놀라서 뛰는 소리도 들리고 무척 일찍 일어나는 새소리도 들렸다. 그러한 때마다 조신은 마치 용선 화상이나 평목이, ‘조신아, 조신아.’하고 부르는 것만 같아서 몸을 멈칫멈칫하였다.

“우리가 얼마나 왔어요?”하고 등에 업힌 김랑이 한삼으로 조신의 이마와 목의 땀을 씻어주며 물었다.

“어디서, 낙산사에서? 큰길에서?”

“낙산사에서.”

“오십 리는 왔을 것이요.”

“길에서는?”

“길에서도 오리는 왔겠지.”

“인제 고만 내립시다.”

“좀더 가지.”

“그건 그렇게 멀리 가면 무엇하오? 나올 때 어렵지요.”

“관에서 따라오면 어떡허오?”

“해가 떴어요.”

“어디!”

“저 앞에 산봉우리 보셔요.”

조신은 고개를 들어서 앞을 바라보았다. 과연 상봉에 불그레하게 아침 볕이 비치었다.

“인제 좀 내려놓으셔요.”하고 김랑은 업히기 싫다는 어린애 모양으로 두 팔로 조신의 어깨를 떠밀고 발을 버둥거렸다.

조신은 언제까지나 김랑을 업고 있고 싶었다. 잠시도 몸에서 내려놓고 싶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팔은 아프고 땀은 흐르고 숨은 찼다. 조신은 거기서 몇 걸음을 더 걷고는 김랑을 등에서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