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에서는 폴벡 씨네 집 정원이 내려다보인다. 우리 집 뒷마당이 코른 골목 쪽으로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오후에 내 방에서 학교 숙제를 하고 있으려면, 고문관인 폴벡 씨가 그의 부인과 함께 다정하게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나누는 얘기 소리도 거의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 내용은 언제나 하나같이 정해져 있었다.
"우리 공주님 그레트헨은 도대체 무얼 하기에 이렇게 오랫동안 보이질 않는 거요?"
이렇게 폴벡 씨가 물어보면, 그 부인은 또 언제나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어머나, 당신도 참. 그 착한 애가 공부를 하지 또 뭘하고 있겠어요."
나는 그 당시 생각으로(몰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이 공부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지도 못하고, 그밖에 다른 일을 못할 정도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 역시 그런 면에서 그레트헨에게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애처럼 그렇게 해 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우리 학교에서도 그레트헨 폴벡에 관한 이야기는 자주 들렸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아이를 보고 '똑똑한 체하기만 하는 메스꺼운 못난이'라고 단정을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집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때문에 받은 인상 탓인지 무작정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애들이 이야기할 때 그 아이를 변호하고 나서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 번은 우리 집에서도 그 아이 이야기가 나왔다. 그 아이와 비교하는 바람에 내가 궁지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니 나 역시 이제는 그 아이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계집애는 양말도 뜰 줄 모르고, 머리 속에 필요도 없는 허접쓰레기나 잔뜩 채워넣고 있는 못된 계집애라고 퍼부어주고 말았다. 그러자 어머니는 나를 나무라면서 내 말을 가로막았다.
"얘, 루드비히야, 네가 저 재주 있는 처녀만큼만 열심히 공부한다면 난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거야. 그 아이는 부모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을 뿐, 너처럼 그렇게 내놓기도 창피한 그런 성적표를 가져오진 않을 거야."
나는 사람을 누구와 비교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그런 것이 교육적으로 가치가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그 기분 나쁜 얘기를 계속 꺼내시는 것이다. 물론 그 결론이야 항상 뻔하다. 나더러 그 그레트헨 폴벡을 열심히 본받으라는 것이 요지였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 아이를 본받을 수 없었다. 부활절 휴가 때에도 과거나 마찬가지로 형편없는 성적표를 집에 가지고 왔던 것이다. 물론 그 성적표는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고 해도 보여줄 만한 것이 못됐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그런 것을 사람들에게 감추는 법이 없는 분이었다.
그래서 친척들은 모두들 좋아라고 손뼉을 쳤다. 그러면서 입을 모아 다음달부터는 어디 가까운 구둣방에 직공으로라도 들여보내야 한다고 아우성들을 쳐댔다. 그러나 나는 내가 손으로 하는 이 훌륭한 직업을 전혀 조금도 싫어한다는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또 벌떼처럼 나서서 나를 수치도 모르는 녀석이라고 열심히 씹어댔다.
그 해 부활절 휴가는 정말 재미없는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집안 친척들은 모두 짜기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합세하여 내가 방학 동안 조금도 재미있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드디어 나를 좋은 길로 인도하는 방법을 알아 냈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를 그레트헨과 사귀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 처녀가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서 나도 그 아이처럼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고문관 폴벡 씨도 이런 생각에 대해 동의한다는 뜻을 비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날 오후부터 그 처녀와 함께 시간을 보낼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당연한 것이지만 이런 일은 도무지 영 내 기분에 맞지 않았다.
당시 라틴어 학교 학생들은 다른 처녀와 사귀는 것을 지금 중고등학교 학생들처럼 당연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밖에도 그 처녀와 사귀는 것이 두려웠다. 거기에는 내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제 앞으로 나보다도 그 처녀가 나를 사귀는 것을 끔찍하게 여길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그러나 물론 이런 나의 그런 걱정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나는 점심을 먹자마자 바로 어머니와 함께 그 집으로 가야 했다. 우리가 그 집에 들어갔을 때 폴벡 씨 부부는 탁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그레트헨은 그 자리에 없었다.
"야, 이것 좀 보라구. 우리 그 애는 그 사이에도 또 공부를 하러 간 모양이야."
폴벡 씨가 말했다. 그러자 그 부인이 나서서 거들었다.
"그 애는 아마 지금 지리학 공부를 하고 있을 거에요. 어제 저녁에 그러는데, 오늘은 지리학을 좀 연구해야 한다고 그러더라구요."
우리 어머니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자 내 가슴이 정말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쿡 찔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도 착하기만 한 우리 어머니를 정말 한 번쯤은 기쁘게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고문관 폴벡 씨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장단 맞추듯 두드렸다. 그러면서 눈썹을 있는 대로 치켜올리더니 묘한 베를린 억양으로 말했다.
"으흠, 그래... 지리학이라. 그렇지, 지리학도 공부를 하고 연구해야지. 인간은 결국 모두 다 이 지구 위에서 살고 있는 존재니까 말이야."
우리 어머니는 이 때 나를 화제에 끌어들이려고 나에게 물으셨다.
"얘, 루드비히야. 너희 학년에서도 지리학 과목을 배우니?"
고문관 부인은 다른 집 아이들도 자기 딸과 똑같은 것을 배우리라고 기대하는 우리 어머니를 비웃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 남편은 몹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애초에는 나도 별로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사람들이 하는 꼴을 보니, 나도 모르게 한 대 먹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비꼬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그건 뭐 굳이 지리학이라고까지 할 것도 없어요. 그냥 지리라고만 해도 충분한 거니까요. 그리고 그런 건 우리 라틴어 학교에서는 아예 취급을 하지 않아요. 학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과목이니까요. 아마 사립 여학교 같은 데서는 그런 것도 가르쳐줄 겁니다."
나는 이 바보같은 위인들을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싶어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내 생각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내 말에 오히려 낭패스러워 하는 것은 우리 어머니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내 말보다는 그 집 사람들 생각이 옳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보다는 그 사람들이 훨씬 더 아는 게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마치 내 말 때문에 큰 무안이라도 당한 듯 낭패스러워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폴벡 고문관이란 작자는 내 말을 듣고 우리 어머니를 아주 딱하다는 눈길로 쳐다보기까지 했다. 우리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까지 고였다. 너무나 창피했던 것이다.
어머니를 그렇게 무안하게 만든 그 바보 같은 늙은이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더니 눈을 나에게 돌렸다. 그 찌푸린 이맛살 하나하나가 무얼 말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즉 나의 장래가 영 글러먹었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표시를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너는 배움이라는 것의 필요를 부인하는 모양이구나. 그러니 네가 부활절 방학 때 받아온 성적표가 제대로 나올 리가 없지. 너의 딱한 어머님도 이렇게 실망하시게 만들고... 너는 지리라고 말하는 것이 지리학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세련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어떤 분야든지 그걸 깊이 파 들어가게 되면, 그건 학문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는 거다. 그렇게 되면 그런 사람은 그냥 지리라고 하진 않아. 지리학이라고 하는 거지."
작자가 그런 식의 설교를 했다고 나는 그 자가 예상했던 만큼 기분이 상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물론 그 따위 엉터리 설교를 참고 들어야 하는 쪽에선, 하는 쪽보다 기분이 훨씬 더 상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작자의 거드름에는 정말 입맛이 썼다.
악동 일기 (2) - 똑똑한 처녀 (1)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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