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기 때문에 그레트헨이 우리 있는 곳으로 나왔을 때 나는 속으로 무척 기뻤다. 그레트헨이 등장하자 고문관 부부는 떠들석하게 그 아이를 맞았다. 내가 창문에서 내다보던 모습과도 또 딴판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 모범생 아이를 얼마나 기쁘게 여기고 있는지를 우리 어머니에게 보여 주고 싶어서 안달이었던 것이다.
부모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대우를 낯 간지러워 하지도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그 아이는 또 어떻게 되어 먹은 셈인가! 다리가 껑충하고 비쩍 말라 몸매가 엉성한 못생긴 계집애가 말이다! 이제 겨우 16살 먹었을 뿐인 이 계집애는 생전 단 한 번도 인형 따위를 가지고 놀았던 적도 없다는 듯, 아주 점잔을 빼면서 코끝을 치켜들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 이제 지리학 공부는 다 끝냈니?"
그 아이의 어머니가 곰살맞게 딸에게 물었다. 그러면서 그 여자는 나를 도전하는 듯한 눈초리로 건너다 봤다. 감히 내가 폴벡 집안의 똑똑한 가족들과 학문적인 논쟁을 계속할 것인지 따지는 듯한 눈초리였다. 그러자 그레트헨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대답했다.
"아뇨, 아직 끝내지는 못했어요. 오늘 저녁에 몇 가지 더 조사하고 정리해야 할 게 남아 있어요. 지금 잡은 주제가 저한테는 너무 흥미진진하거든요."
그 계집애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는 모습은 마치 자기가 유명한 대학 교수나 되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자 폴벡 씨는 자랑스럽게, 자 어떠냐는 듯이 다시 한 번 나를 쳐다보았다.
"토마 군, 그래 자네는 이런 얘기를 듣고도 지리가 제대로 된 학문이 못 된다고 얘기를 할 수 있는가?"
나는 그냥 얼굴을 돌려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폴벡 씨는 다시 자기 딸에게 물었다.
"너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그러나 그 때 마침 그레트헨은 주먹 크기만한 빵을 입에 통째로 집어넣었기 때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아무렇게나 고개만 끄덕거렸을 뿐이다. 그래서 그 폴벡 씨의 질문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그런 모습들을 그저 감탄과 존경에 찬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저 신통하기 짝이 없는 이 처녀를 쳐다봤다가, 다음에는 금방 또 근심에 휩싸여서 나를 돌아다보기도 했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폴벡 씨 부인은 아마 우리가 그 집을 방문한 원래 목적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얘, 그레트헨. 이 토마 씨 부인이 아드님인 루드비히 군을 데리고 오신 건 말이야, 루드비히 군을 너와 사귀게 하시려는 거야. 그렇게 하면, 루드비히 군의 공부도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시란다."
폴벡 씨 부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이번에는 우리 어머니도 거들었다.
"그레트헨 양이 공부를 열심히 잘한다는 사실은 우리 동네에 다 알려져 있답니다. 저도 그레트헨 양을 칭찬하는 소리를 주위에서 많이 듣지요. 그래서 우리 아이가 그레트헨 양과 함께 사귀면서 가까이 지내게 되면, 우리 아이도 배우는 것이 많아지지 않을까, 공부가 좀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답니다. 물론 우리 아이 성적이 좀 나쁜 편이긴 하지만 말이에요."
그러자 고문관 폴벡 씨가 어머니 말을 가로채고 나섰다.
"토마 씨 부인, 이 아이는 성적이 조금 나쁜 게 아니라 아주 많이 나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나를 넌지시 노려보았다.
"예, 사실 그래요. 좀 많이 떨어진답니다. 그래서 제가 속이 상하지요. 하지만 그레트헨 양의 도움을 받고, 또 저 아이 스스로 어머니를 위해 지금보다 노력을 한다면 꼭 나아질 거라고 봅니다. 저한테도 그렇게 하기로 단단히 약속을 했답니다. 그렇지 않니, 루드비히?"
물론 나는 어머니와 약속을 했다. 그러나 나는 폴벡 씨 집에서는 그 약속을 되풀이해서 말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폴벡 씨 집안 사람들 앞에서 나의 훌륭한 계획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코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이 모범적인 가족은 사실 내가 타락하는 걸 더 좋아한다는 것을,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나는 마음 속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씨 좋고 악의 없는 우리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지만, 나는 어머니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그걸 느끼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우리끼리 주고받는 동안 공부를 많이 하는 이 집 따님은 먹던 버터 빵을 마저 꿀꺽 삼키고 드디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것도 제멋대로 반말 투였다.
"얘, 너 도대체 지금 몇 학년이니?"
물론 내 성적표는 그 아이에 비교하면 훨씬 못할 것이다. 학년으로 따져도 나는 한 학년 밑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온 경험이랄까, 그런 것은 내가 훨씬 더 경험이 많고 노숙한 어른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감히 그런 나를 보고 반말이라니... 그러나 지금 그런 걸 따지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난 지금 4학년이다."
나는 대답했다.
"그러면 너희들은 지금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코르넬리우스가 나오는 부분쯤 배우고 있겠구나?"
그레트헨의 말투는 자기가 마치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나한테 그런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내가 뭐라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그 아이 어머니가 먼저 끼어 들었다.
"너는 물론 진작 그걸 읽었겠지, 그레트헨?"
"저는 이미 3년 전에 플루타르크 영웅전은 다 읽었어요. 하지만 그 책은 너무나 내용이 좋아서 지금도 가끔 펴 보고는 하지요. 어제도 에파메이논다스의 전기를 다시 읽었어요."
"흠, 에파메이논다스라고? 그래, 그래. 그는 대단히 흥미 있는 인물인 것에 틀림이 없어."
이번엔 그 아버지가 끼어 들었다.
"물론 학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저 친구한테는 그렇지도 않을 테지만 말이야."
나는 그래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저 침묵을 지키는 것이 이들을 경멸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그들의 그런 수작을 견디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 루드비히야. 너도 그 책을 집에 가지고 있지 않니? 배웠어? 배웠다면 그레트헨 양하고 그 책에 관한 얘기를 좀 해 보려므나. 그래야 네가 얼마나 공부를 했는지 그레트헨 양도 알 수 있지 않겠니?"
"우린 아직 에파메이논다스는 배우지 않았어요."
나는 마지못해 대꾸했다.
"그러면 알키비아데스는 배웠을 테지. 그 책에서 코르넬리우스 부분까지는 아주 쉬워. 하지만 5학년으로 올라가게 되면 그 때부터는 정말 어려운 내용을 배우기 시작한단다."
나는 무작정 사람을 우선 한풀 접어놓고 제 멋대로 지껄여대는 이 건방진 계집애를 아주 코가 납작하도록 혼을 내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아무리 약이 올라도 그저 아무 말 않고 잠자코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 그 수밖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그 계집아이는 내가 미처 뭐라고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저 혼자서 쉬지 않고 지껄여댔기 때문이다.
그레트헨은 마치 태엽 감은 것이 다 풀릴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지껄여대야 하는 자동 인형 같았다. 이 처녀는 우리 어머니 앞에서 계속해서 낯선 라틴어 이름들을 늘어놓았다. 불쌍한 우리 어머니는 그래서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었다. 이 계집애가 다 지껄이고 나면 아마 머리 속이 텅 빈 것처럼 되어 버릴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데에는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폴벡 씨 부부는 계속해서 딸에게 뭔가 그럴싸한 말을 시켜 보려 했지만, 그 아이 머리 속에는 이제 더 이상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더니 그 계집애는 지리학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재빨리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리 어머니는 그 뒤에도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앉아 있었다. 한껏 만족한 폴벡 씨 부부는 자기네 딸이 우리 어머니에게 미친 충격을 살펴보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들은 자기 딸의 실력에 우리 어머니가 완전히 납작해져 버린 것을 확인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완전히 야코가 죽어서 폴벡 씨 부부에게 작별을 하고 나와 함께 그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그리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아무 말씀도 없었다. 어머니는 집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그래도 내 머리를 사랑스러운 듯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으셨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딱한 녀석 같으니라구. 너는 아무리 해도 그 아이처럼 되지는 못할 거야."
나는 온갖 약속으로 상심한 어머니를 위로하려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저 슬픈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면서 이렇게 되풀이할 뿐이었다.
"아니, 아니야... 아무래도 그 아이처럼 그렇게 될 수는 없을 거야."
그리고 사실 어머니 말이 맞았다. 나는 그 아이처럼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서 나는 다행스럽게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했지만, 그 전 해에 한 번 시험에 떨어져서 다시 나와 같이 시험을 보았던 폴벡 씨의 딸은 그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합격을 못 하고 말았으니까. 물론 이것은 후일담에 속한 이야기라서 여기서 구구이 밝힐 성질의 것은 아니다.
악동 일기 (2) - 똑똑한 처녀 (2)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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