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요일마다 루푸 씨의 집에 가곤 했다. 그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게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 아버지의 옛날 사냥 친구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집에다 사슴을 여러 마리 잡아다 주기도 했다.
그와 함께 일요일 한나절을 지낸다는 것은 아주 멋진 일이었다. 그는 나를 거의 어른처럼 대접해 주었다. 그래서 식사가 끝나면 언제나 여송연을 내주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도 이제 이 정도는 이미 피워도 상관 없겠지. 너희 아버지는 담배를 기차 화통처럼 피워대던 사람이니, 너도 골초가 될 것은 틀림없다."
아버지 친구로부터 이렇게 인정을 받고 보니 나는 내 자신이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친구와 맞담배를 피우는 그 멋진 맛이란,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도리가 없을 것이다.
루푸 씨 부인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상한 분이었다. 부인은 말을 할 때면 표준 독일어를 쓰기 때문에 입술이 뾰죽해지곤 했지만, 그러는 입 모양조차도 아주 고상해 보였다. 부인은 나 보고 항상 손톱 물어뜯는 버릇을 고치고, 말할 때는 정확한 발음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주의를 주곤 했다.
그 집에는 딸이 하나 있었다. 아주 예뻤고, 향수를 사용하는지 항상 좋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내가 겨우 1살세밖에 되지 않기 때문인지, 그 딸은 나에게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저 무도회며 음악회, 그리고 뛰어나게 훌륭한 일류 가수들 이야기만 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가끔 사관학교 이야기가 나오곤 했다. 그것은 그 여자를 찾아오는 사관학교 학생들로부터 들은 것이었다.
사관학교 학생들이 그 집에 찾아올 때면 발소리보다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이 철그럭거리는 소리가 더 요란했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면 특히 더했다. 나는 나도 현재 사관학교 학생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내가 사관학교 학생이라면 나도 그 여자의 마음에 들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어떠한가? 그 여자는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그래서 상대도 안 되는 코흘리개 정도로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자기 아버지하고 여송연을 맞담배하면서 피워대는 것을 볼 때마다, 정말 가소로운 꼴을 본다는 듯 기분 나쁘게 웃곤 했다.
그런 점이 나를 종종 기분 나쁘게 했기 때문에, 나는 그 여자에게 향하는 내 애정을 깔아 뭉개 버리곤 했다. 그러면서 마음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앞으로 나는 장교가 되어 가지고 전쟁에 나가 혁혁한 공을 세워 영웅이 되어 돌아오리라. 그렇게 되면 그 여자는 나에게 완전히 반해버릴 거야. 하지만 그 때 가선 난 저 여자를 본 체도 하지 않을 거야.
그 딸의 일만 빼놓으면 루푸 씨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참으로 기분이 좋고 유쾌했다. 나는 매주 일요일을 기쁘게 맞이했고, 그 집에서 나누는 점심 식사와 여송연을 즐겨 기다렸다.
루푸 씨는 교장 선생을 알고 있었다. 자주 만나서 이야기도 하는 사이였다. 루푸 씨는 교장에게 나를 일요일마다 초대해서 자기 식구들과 같이 지낸다는 것, 내가 장차 틀림없이 우리 아버지처럼 사냥도 잘 하는 사내다운 사내가 될 것이라는 생각 등을 얘기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교장 선생이 나를 좋게 말할 리가 없었다. 그것은 루푸 씨가 나에게 가끔 이런 말을 하는 걸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 낮도깨비 같은 작자는 네가 하는 짓을 모두 알고 있다. 너는 아마 대단한 말썽꾸러기인 모양이야. 그러니까 그 작자가 그렇게 욕을 해대는 거야. 하지만 그 작자들도 사람이니까 너무 그렇게 속을 썩혀줄 필요는 없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어찌 일요일에 그의 집에 가는 것을 기다리지 않겠는가. 루푸 씨는 그 누구보다도 나와 잘 통하는 어른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그만 마가 끼고 말았다. 그렇게 된 까닭은 이러했다. 나는 아침 8시에 학교에 갈 때마다, 양재 학원에 나가는 우리 하숙 뒷집의 딸과 골목 어귀에서 만나게 되곤 했다.
그 처녀는 아주 예쁜 얼굴이었다. 머리를 두 갈래로 길게 땋아 내리고, 그 끝에 빨간 리본을 잡아매었다. 젖가슴도 벌써 도톰하게 솟아 있었다. 내 친구 라이텔은 그 애가 벌써 다 자란 처녀이며, 다만 새침을 떼고 있는 거라고 늘 말하곤 했다.
나는 처음엔 그 애한테 감히 아는 체하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고개를 꾸벅하고 인사를 했더니 그 아이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었다. 그 후부터 나는 그 아이가 아침마다 골목 어귀에서 나와 마주치는 것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좀 늦는 날이면 그 아이는 거기 서서 기다리기까지 했으니까. 그 아이는 내가 나올 때까지 제본소 상점을 들여다보며 서 있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길이 마주치면 반갑게 웃어 보이고 총총걸음으로 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번 말을 걸어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가슴이 마구 두근거려서 말은 한 번도 걸어 보지 못했다. 한 번은 그 아이 곁으로 아주 가까이 다가간 적도 있었지만 기침을 한 번 했을 뿐, 목이 칵 막혀서 말은 한 마디도 못 하고 말았다. 라이텔은 그까짓 계집아이를 상대하는 것쯤은 조금도 어려울 게 없다고 했다. 자기는 그럴 생각만 있으면 날마다 계집아이 세 명에게 말을 걸 수도 있지만, 모두 너무 시시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너도 여자 애들한테 말을 못 걸어봤다는 거 아니냐?"
"못 걸어본 게 아니라 안 건 거지."
"결국 그게 그거지 뭐야."
"아니지, 차이가 있지. 이를테면..."
"허튼 소리 하지도 마. 난 지금 심각한 얘기를 하는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하는 소리 아니냐. 얘기를 걸고 싶으면 그냥 거는 거야. 그게 뭐가 어려워서 그러니? 여자 애들도 사람이라고. 우리하고 똑 같은 거야.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말을 쓰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별 것 아니라고. 난 정말이지 말 걸고 싶은 애가 있으면 하루에 세 명 정도에겐 얼마든지 걸 수 있다."
나는 내가 할 말을 여러 가지 생각했다. 그 애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그 모두가 무척 손쉬운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 여자 애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빵집 딸인데다 겨우 양재 학원에나 다니는 여자 애가 아닌가. 나는 라틴어 학교의 3학년 학생이다.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낙제는 아직 한 번도 안 했고, 앞으로도 낙제는 안 할 것이다. 그리고 대학에도 갈 것이고...
그런데도 정작 그 여자 애를 보면 기분이 아주 이상해져서 마음먹었던 것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 여자 앞에서 말을 꺼낸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다.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그래서 나는 묘안을 생각해냈다. 편지로 말을 대신하자는 생각이었다. 그건 과연 묘안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편지를 쓴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쓸 낱말을 고르는 것이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쓰고야 말았다. 무려 1주일 이상 끙끙대며 편지에 매달린 끝에...
나는 편지에다 이렇게 썼다... 나는 당신을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말을 걸어, 그런 사실을 고백하면 그 쪽에서 무안하게 생각할지 몰라 걱정이다. 그래서 이렇게 편지로 고백한다. 그러니 그 쪽에서도 내가 싫지 않다면 나를 만날 때 손에 손수건을 들고 있다가 입에 갖다 대 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안심하고 당신에게 말을 걸겠다... 대개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그 편지를 학교에서 배우는 시저의 <갈리아 원정기> 속에다 꽂아 두었다. 아침에 그 여자 애를 보면 그걸 꺼내 주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일도 생각했던 것과 달리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첫날에는 엄두도 못 내고 지나쳐 버렸다. 다음 날은 미리 단단히 벼르고 편지를 손에 쥐고 있었지만, 그 여자 애가 보이자 나는 편지를 얼른 주머니 속에다 집어넣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나를 라이텔은 매일 같이 성가시게 독촉했다.
여느 때는 용감한 네가 이런 일에는 왜 그렇게 형편없는 겁쟁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냐, 그러다가는 그 편지가 네 주머니 속에서 낡아서 아주 걸레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면 너는 또 편지를 쓰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러는 동안 그 여자 애는 그 사이에 어디론가 시집을 가서 애 어멈이 되어 있을 거다... 이러면서 내일 당장 편지를 전해 주라고 성화였다.
악동 일기 (2) - 나의 첫사랑(1)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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