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녀가 제 방으로 들어와서 이윽고 창으로 모습을 나타낼 거라고 확신했다. 오랜만에 내 앞에 나타날 때마다 영애는 꼭 한 번씩 내 조바심을 건드리곤 했다. 일단 모습을 잠깐 보여준 뒤 그녀는 금방 다시 부엌이나 소금창고 뒤편으로 숨어 버린다.
그녀는 내가 창 앞에서 자기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너무 잘 알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린 사람 앞에 갑자기 나타났을 때 그녀는 쑥스럽고 어색하고 미안한 것이다. 잠깐 나타났다가 다시 숨는 건 그런 감정의 표시였다. 그런 때는 영애는 반드시 금방 다시 나타났다. 그것은 언약을 지키듯 어김이 없었다.
리기다소나무 뒤에서 그녀가 사라진 뒤 반시간 쯤 지났을까? 이윽고 노란색의 형체가 맞은편 창 안에서 어른거렸다. 그녀는 이미 방 안으로 들어와서 창 뒤에 몸을 감추고 이쪽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섣불리 자기 모습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그녀의 상반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란색의 블라우스가 눈이 부시도록 선명했다. 그녀의 하얀 피부, 큰 눈, 그리고 놀란 새처럼 어릿어릿해하는 그 진기한 표정이 마치 액자 속의 정물처럼 한눈에 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온몸이 떨리고 가슴이 마구 뛰었다. 가장 단순하고 명료한 구도의 정물화가 거기 있었다. 내가 염산에서 보았던 그 명료한 구도가 아주 훌륭하게 재현되고 있었다.
대담하게 상반신을 드러냈던 그녀는 곧 창문 뒤로 몸을 감췄다. 나는 다시 기다렸다. 30초쯤 지난 뒤 그녀는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표정이 전과 달랐다. 그녀는 약간 화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녀는 웃을 수도 찌푸릴 수도 없는 애매하고 난처한 입장이라는 걸 표정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그녀와 나, 오직 이 둘만이 존재하는 공간에 엉뚱한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내 입장에서 보면 그는 분명 침입자였고 그의 입장에서 보면 이번에는 내가 침입자일 수도 있었다.
사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대머리 사내가 이때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파란 줄무늬의, 마치 환자복 같은 파자마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은 새까맣게 우락부락한 용모였으며 게다가 코밑에는 콧수염까지 기르고 있었다. 나는 그 대머리 중년남자가 그녀의 아빠라는 걸 금방 알았다.
그는 군인인데 계급은 대령인지 장군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나는 그 사람이 부관을 거느린 고급 장교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이 이 시간에 집에 돌아와 있을까? 그러고 보니 그날이 토요일이었다.
그 남자는 다짜고짜 딸이 서 있는 창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일단 맞은편 빈 터에 서 있는 나를 한 차례 바라보았다. 그 눈초리는 사납고 날카로왔다. 그건 귀여운 딸을 가진 남자들이 본능적으로 나타내는 기질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나를 노려보았을 때 나는 몸이 얼어붙어 버리는 줄 알았다. 그는 나를 노려본 다음 딸에게 뭔가를 물었다.
틀림없이 저쪽에서 자기네 집 창을 향하고 서 있는 녀석에 관해 물었을 것이다. 나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 계집애가 아빠에게 사실을 고스란히 말해 버릴 가능성이 훨씬 많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때는 자유롭게 움직이는 쪽, 즉 밖에 있는 쪽이 절대 불리했다.
그렇다고 그들의 눈앞에서, 특히 그녀가 지켜보는 앞에서 달아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계집애는 아빠에게 뭐라고 대답을 했다. 그녀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모든 걸 체념했다. 눈앞이 갑자기 캄캄했다. 기적 같은 행운에는 역시 거기 맞먹는 재앙도 따르는 것이다. 그녀의 아빠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그 남자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곱게 딸의 방에서 나가 버렸다. 나는 그의 행동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한마디 불평도 없이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 공간에 다시 우리 둘만 남게 되자 이번에는 심술장이처럼 얄미운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그것은 아빠의 추궁으로부터 나를 보호했다는 자기의 선행을 내게 뽐내는 미소였다. 그리고 그 순간에 그녀와 나는 우리 둘만의 언어를 갖게 되었다. 우리 둘만의 비밀, 우리만이 아는 신호, 말 없는 언약이 그 순간에 성립된 것이었다.
그날 이후에도 나는 자주 그 언덕 위의 빈터에 나타났었다. 어떤 때는 거의 매일 그곳을 찾아가기도 했다. 거기 갈 때마다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대체로 두 번에 한 번꼴로 나는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면 조바심 때문에 바로 다음날 나는 또 그곳을 찾아갔다.
그렇게 창 앞에 있는 그녀를 자주 보면서도 이상하게도 거리에서 나 혹은 버스 속 같은 데서는 한 번도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나는 우리가 서로 공모해서 만나는 장소를 한 곳으로 제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신께서 우리가 다른 장소에서 만나는 걸 허용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다른 방식으로 만나기를 원한 건 아니었다. 도리어 나는 그런 기회가 있을까봐 두려웠었다. 그런 경우에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나는 그런 경험조차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는 금호동을 떠났다. 자연히 그 장소와도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몇 해 뒤에 직장에 나가면서는 나도 그 또래 남자들이 누구나 그렇듯이 사람들이 말하는 진짜 연애라는 걸 몇 차례 시도해 보았다. 그런데 번번이 어처구니없는 실패로 끝이 났다.
내가 어처구니없는 실패라고 말하는 건 그 당시에는 실패의 원인을 나 자신도 까마득히 몰랐기 때문이다. 실패는 열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되풀이되었다. 결국 나는 진짜 연애에 관해서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내가 존경하는 어떤 노인께서는 나에게 악귀가 씌어서 아직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악귀는 전생에 나와 악연을 갖고 있는데 지금 그 화풀이를 내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실컷 화풀이를 하고 나면 내게서도 떠날 것이고 그때는 나도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