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동 로터리에서 남쪽으로 내리막길을 한참 내려오다 다시 왼쪽으로 좁은 길을 꺾어 돌아가면 작은 집들이 옹가종기 모여 있는 그 야트막한 언덕이 나타난다. 지금은 그 부근의 집들이 규모로나 모양새로 봐서 너무 초라하고 볼품이 없는 낡은 가옥들이 돼 버렸지만 내가 그 언덕을 자주 찾아다닐 때만 해도 그곳은 마치 잘 닦아놓은 보석처럼 번쩍번쩍 빛이 나는 신흥 주택가였다.
당시로는 제법 득세한 중산층들이 그곳에 아담한 새 집을 짓고 거기에 정착했는데 집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집 구조가 짜임새가 있었고 또 집을 아주 탄탄하게 짰기 때문에 멀리서 바라보면 마을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산뜻하게 보였다.
길은 언제나 부지런한 주민들에 의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언덕길을 오를 때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이 도시의 모든 시민들이 적어도 이 정도로 안정되고 청결한 동네에서 살게 된 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곤 했었다. 나는 지금도 그 야트막한 언덕에 있는 마을과 넓은 찻길에서 왼쪽으로 꺾어 돌아가는 꼬불꼬불한 비탈길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렌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깨끗한 비탈길과 마을이 사실상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다.
얼마 전 나는 그곳에 갔었다. 그런데 비탈길은 여기저기 모서리가 무너지고 길바닥은 휴지와 지저분한 상품 포장지로 더럽혀져 있었다. 아담하고 산뜻했던 작은 가옥들은 이제 빛이 바래고 내 눈에도 너무 왜소하게 비쳐 한낱 빈민들의 은신처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을이 지나치게 변해버린 모습을 보고 몹시 당황했다. 그사이 세상은 말할 수 없이 풍요해졌고 화려한 모습으로 변신을 했다. 그런데 오직 이 언덕에 있는 마을만 이십 수년 동안 고스란히 잠을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을은 이제 삭막하고 냉랭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마치 비천하게 전락한 여자가 옛 남자의 방문을 무감동하게 바라보고 있는 듯한, 그런 싸늘한 분위기를 느꼈다. 마을은 나를, 내 기억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그녀를 발견한 건 저녁때였다. 여름 이른 저녁때라 아직 주위는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마을의 굴뚝 꼭대기에서는 저녁을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빗방울이 이따금씩 똑똑 떨어졌다. 동네 복판에는 아직 집을 짓지 않은, 꽤 넓은 빈터가 있었는데 나는 그 빈터의 한쪽 모퉁이에 서서 마을의 저녁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서너 명의 아이들이 갑자기 저쪽 골목 속으로부터 내가 서 있는 빈터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가 소리를 지르며 빈터를 한 바퀴 돌더니 다시 골목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아이들은 아마 그때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부분이 사내들이었는데 녀석들은 고작 국민학교 삼사학년 또래의 아이들이었다.
다만 그 무리 속에 약간 덩치가 큰 계집애가 하나 함께 있었다. 그 애는 아주 빨간 스웨터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애가 사내가 아닌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애는 분명 중학생이었다. 사내애들보다 그만큼 덩치가 더 컸다. 중학생인 여자아이가 조무래기 사내들 틈에 섞여 골목 저쪽으로 뛰어가는 모습이 어쩐지 어색해 보였다.
그녀 자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는지, 조금 전 나와 아주 가까운 곳까지 접근했을 때 나와 우연히 눈길을 마주친 그녀는 얼굴을 살짝 붉혔었다. 나는 그 순간을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나쳤다. 내가 다른 점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때는 그녀가 다만 보통 체격의 여학생이고, 피부가 비교적 하얗고, 검고 큰 눈을 가지고 있는 아이라는 것만 알았다. 그런 여자아이는 사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별다른 느낌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나는 내가 그 계집애를 거기서 만난 것이 두 번째의 만남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걸 깨닫게 해 준 것도 그녀였다. 조무래기 아이들과 쏜살같이 달아났던 그녀는 잠시 후 내가 서 있던 지점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조그만 양옥의 창문에서 갑자기 솟구치듯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