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창문은 내가 서 있는 지점에서 겨우 30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그 이전까지 창문은 닫혀 있었는데 그 애가 얼굴을 내밀기 위해 갑자기 창문을 열었었다. 창문은 집의 규모에 비하면 약간 커 보였다. 그 집은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빨간 벽돌 건물이었고 누구나 한번 들어가서 살고 싶은 생각이 날만큼 앙증맞게 지어진 예쁜 주택이었다. 마당도 제법 넓고 마당에는 새로 옮겨 심은 듯한 몇 그루의 관상수들이 얕은 담장 위로 솟아 있었다.

 

갑자기 창문을 통해 불쑥 나타난 그 계집애는 처음에는 대담하게 상반신을 드러내놓고 맞은편에 서 있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나는 몹시 당황했다. 나는 그 이전까지는 남의 집 울타리 바깥에서 집 안에 있는 사람의 시선을 받아 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런 경험이 내게 있었더라도 그때처럼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나를 쏘아보는 순간 나는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왜냐하면 그녀는 당연히 자기가 있어야 할 장소에 있는 반면 나는 단지 지나가는 행인에 지나지 않으며, 내가 그 자리에 오래도록 서 있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 건 내가 낯이 설고 무서운 남자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때 두 번째 마주쳤고 그녀도 그걸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그녀는 창을 열고 나를 바라본 것이다.

 

뒤늦게야 나도 그녀의 유난히 검고 큰 눈을 기억해냈다. 그 기억을 찾아낸 순간 나는 온몸이 떨렸다. 왜냐하면 처음 마주쳤을 때 나는 별다른 목적도 없이 이 계집아이가 살고 있는 동네와 그녀의 집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는 그것은 막연한 희망이었고 나 자신도 그걸 알게 되리란 기대는 갖지 않았다.

 

나는 그날 학교에 가느라고 로터리에서 이른 아침의 만원버스에 올랐다. 초겨울이었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든 사람도 있었고 기세 좋게 비를 맞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아침버스는 언제나 만원이어서 나에겐 지옥 같았다. 버스를 탈 때마다 나는 내가 잠시 동안 지옥을 통과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지옥을 통과하는 아침 등교였지만 대학 신입생이었던 내겐 언제나 아침 등교가 즐거웠었다.

 

버스에 오른 나는 용감하게 가운데로 비집고 들어갔다. 버스는 곧 로터리를 떠났다. 차체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위치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검은 학생 오버코트를 입은 단발머리 여학생이 내 앞으로 바짝 가까이 밀려왔다. 그녀의 키는 내 가슴에 닿았다. 그녀도 나처럼 우산을 들고 있지 않았다. 만약 우산을 들고 있었다면 우리는 더 큰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그녀는 몹시 무거운 책가방을 주체하지 못하고 끙끙거렸다. 나는 그녀가 내 눈앞에 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끙끙거리는 모습을 한동안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머리는 비에 젖어 있었고 검은 오버코트의 깃에도 물기가 번쩍거렸다. 그녀의 하얀 얼굴에도 빗물이 묻어 있는 것 같았고 검은 눈에도 빗물이 스며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큰 눈은 잔뜩 겁을 먹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의 책가방을 살며시 빼앗아 들었다. 그것은 천근처럼 무거웠다. 내가 한 행동은 선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천근같이 무거운 책가방을 빼앗아 든 순간에 나는 고통 대신 기묘한 즐거움을 느꼈던 것이다.

 

갑자기 책가방을 빼앗긴 그녀는 여전히 겁을 집어먹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웃어 보이거나 고맙다는 인사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내가 그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그녀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내가 내리는 정류장에서 그녀에게 말없이 가방을 넘겨주고 버스에서 빠져 나왔다.

 

그때 버스에서 내린 뒤 그 버스가 떠나는 걸 바라보면서 나는 문득 그 계집아이가 살고 있는 집과 동네를 알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걸 알고 싶은 뚜렷한 동기는 없었다. 다만 뭔가 잃어버린 것 같은 허전한 기분이 그때 가슴을 가득 채웠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래 전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을 또 다시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모든 내 기분의 정체를 세밀하게 자각하지는 못했었다. 나는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 가까스로 그때의 내 기분의 정체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