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 한낮 같은 때는 영애는 오렌지색 블라우스와 푸른색 치마를 입고 제 친구들과 넓고 깨끗한 마당에서 고무줄넘기를 했다. 그녀가 깡총거리며 고무줄넘기를 하는 동작은 아주 민첩하고 우아해서 마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가을 저녁때나 이른 아침에는 영애는 바로 내 방 창문 앞에까지 와서 배추를 뽑아 가거나 고추를 따서 가져가기도 했다. 그녀와 지척의 거리에 있게 되면 나는 또 두려움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곤 했다. 나는 나의 가쁜 숨결이 그녀의 귀에 들릴까봐 겁이 났다. 무엇보다 두려운 일은 영애가 이쪽 창 안쪽에 숨어 있는 나를 이미 발견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창 안쪽에 숨어서 자기를 매일같이 몰래 훔쳐보며 내가 누리는 비밀스런 즐거움을, 그야말로 내 마음 속의 은밀한 비밀을 그녀가 이미 간파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나는 두려웠다. 나는 내가 영애에게 일종의 범죄행위를 하고 있다는 자괴감을 느끼곤 했다. 나는 그녀와 말 한마디 나눈 일도 없었고 영애라는 아이가 도대체 나를 알고 있는지 어떤지조차 몰랐다. 나는 수년 동안 거의 내 몸을 바깥에 드러내지 않고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영애는 그 모든 걸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내가 그녀가 알고 있었다는 걸 몰랐을 뿐이었다. 깜찍한 그 계집애는 창 안쪽에 숨어서 자기를 지켜보는 시선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른 척 그 동안 시치미를 떼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느 가을 저녁나절 그녀는 배추밭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허리를 굽히고 탐스럽게 잎새가 자란 배추 두 포기를 밭에서 뽑아냈다. 나는 그녀가 배추를 들고 곧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런데 밭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가 갑자기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지극히 냉정한 눈길로 조용히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과 태도는 엄숙할 만큼 침착하고 의젓했다. 그 조용한 눈길은 무엇을 새로 찾는 눈길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자리에 그것이 여전히 있는가를 다시 확인하는, 그런 눈길이었다. 나는 전신이 발가벗긴 채 완전히 노출된 것 같은, 참혹하고도 동시에 후련한 기분에 빠졌다. 그 순간은 영애와 나 사이에 그 기묘한 숨바꼭질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영애는 이따금씩 내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거기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잠시 조용히 지켜보다가 이내 눈길을 돌리곤 했다. 영애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마당에서 놀다가도 문득 동작을 멈추고 이쪽을 혼자 은밀히 쳐다봤다. 그런 때의 영애의 표정에는 혼자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다소 긴장된 분위기가 엿보였다.
이미 우리는 우리 둘만이 통하는 언어를 갖게 된 셈이었다. 그것은 마을의 누구도, 심지어는 영애의 어머니도 알 수 없는 우리만의 언어였다. 영애가 비밀을 지키기로 한 이상 아무도 우리의 대화를 엿들을 수는 없었다. 영애는 아주 지혜롭고 은밀하게 내게 신호를 보내오곤 했다.
그녀는 밖에 나와 있을 때는 언제나 내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 영애는 잘 웃는 아이였다. 이따금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도 그녀는 갑자기 까르르 소리를 지르며 자주 웃었는데 그런 때는 웃음소리를 좀 더 크게 과장하거나 얼굴에 애교를 듬뿍 나타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 때는 영애가 아직 어린 계집애가 아니라 다 성숙한 처녀 같아 보였다.
그녀는 언제나 내 눈길이 잘 미치는 자리에 있으려고 애썼다. 어쩌다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있게 되면 그녀는 재빨리 돌아섰다. 고무줄넘기를 할 때도 영애는 갑자기 그 놀이에는 불필요한 이상한 동작을 취하곤 했다. 뜀을 뛰면서 마치 무희가 춤추듯 두 팔을 크게 벌리고 부드럽게 흔드는 것이다. 그 이상한 동작은 적어도 자기의 친구들을 향한 신호는 아니었다. 그 아이들이 영애의 그 이상한 몸짓을 알 턱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