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계집아이는 집에 돌아왔을까? 그녀는 오늘도 빨간 스웨터를 입고 있을까? 비탈길을 올라가며 나는 갖가지 궁금증에 사로잡혀 혼자 자문을 계속했다. 내 머리속은 온통 그녀에 대한 무성한 추측과 상상으로 가득했다. 무엇보다 나는 그 아이가 두 번째의 대면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궁금했다. 나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했을 때 두렵고 겁이 났다. 그냥 돌아서서 오던 길로 가버리고 싶기도 했다.
무더웠던 한낮이 지나고 여름해가 기울어가기 시작한 오후 다섯 시경이었다. 아직 주위는 투명하게 밝았다. 한낮의 열기도 아직 완전히 식어 버린 때는 아니었다. 빈 터에서는 조무래기들이 흙장난을 하면서 놀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들이 모두 사내애들이라고 생각하고 가까이 접근했다. 내가 처음에 잘못 본 건 그 애가 그날은 옷을 바꿔 입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빨간색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가까이 접근했을 때 조무래기들 속에서 아이 하나가 이쪽을 힐끗 돌아보더니 질겁을 하고 일어서서 저쪽 골목으로 쏜살같이 달아나는 것이 아닌가?
그때서야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달아난 그 아이는 바로 그 계집애였다. 그녀는 소매가 짧은 노란색 블라우스와 재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런 옷차림으로 쏜살같이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홉사 사내 같아 보였다.
함께 놀고 있던 조무래기들이 일제히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 애들은 곧 다시 흙장난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나를 발견한 그녀가 질겁을 하고 달아난 데 대해서 나는 본능적으로 무안을 느꼈고 당황했다. 쉽게 생각하면 그건 적대감이나 경계심의 표현이었다. 그렇지만 반대로 그녀가 그때 그 빈터에서 태연스럽게 놀고 있었더라면 나는 더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숨바꼭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빈터의 한쪽 모퉁이로 가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은 내게 익숙한 일이고 그건 내가 맡은 역할이었다. 나는 그녀가 이젠 자기 집 안방 깊숙한 곳에 숨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다시 나타난 내게 겁을 먹었고 따라서 내가 그 빈터에서 떠날 때까지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가능성이 많았다. 나의 이 판단은 옳았다. 그녀가 얼마간 겁을 먹었고 무척 당황했다는 건 곧 증거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그 증거라는 것도 그녀의 모습과 동시에 나타났기 때문에 내가 그 자리에서 떠나야 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한동안 맞은편의 유리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은 열려 있었지만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나타난다면 틀림없이 그 창에서 모습을 보여 줄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당가의 나뭇가지가 그때 흔들렸다. 나는 방금 가지가 흔들린 리기다소나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계집애는 그 리기다소나무 뒤에 몸을 감추고 가지 사이로 얼굴만 반쯤 내밀고 이쪽을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큰 새 한 마리가 숲 속에 몸을 감추고 가까이 접근한 사냥꾼의 동정을 관찰하고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그녀는 새처럼 동작이 날렵하고 촉각이 예민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감쪽같이 나무 뒤에 몸을 숨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게 자기의 모습을 발각당한 그녀는 잔뜩 긴장한 눈초리로 한참 동안 그대로 이쪽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기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빈터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던 조무래기들도 어느덧 모두 떠나고 보이지 않았다.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이따금 서늘한 바람이 언덕 위로 불어왔다. 나는 혼자 꽤 오랫동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