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함정에 빠진 쥐가 어떻게 군다는 걸 알고 있어요.
순열씨는 정철훈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조용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구태여 날 위협하지 않아도 된다 이거요. 당신이 무섭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까.
그는 말을 끝내자 이내 벽가로 물러나 벽을 향해 돌아앉았다. 그리고는 자기가 방금 지껄였던 행동을 곧 후회했다. 나는 빗나갔어. 나는 지금도 중사의 말마따나 술이 취해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나는 하사를 미워하지 않았는데 그는 나를 증오하는 눈초리로 보았기 때문이야. 그는 정철훈의 말을 흉내내어 보고는 속으로 공연한 너털웃음을 웃고 있었다.
0시 30분에 불침번 교대를 한 순열씨는 벽에 기대고 서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이따금 근무자의 발자국 소리가 2호 앞을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는 똑바로 서는 부동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불침번이 벽에 기대는 게 근무자에게 발각되면 작살이 난다는 경고를 데빡으로부터 받은 일이 있지만 순열씨도 이제 감방 질서에 조금씩 도전해보는 데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바로 감방에 적응해가는 과정이라는 걸 빨리 이해한 것이다.
밤 시간은 낮보다 한층 빠르게 지나간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또 이 벽은 자기가 기대기에 충분할 만큼 견고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는 졸음에 시달리면서 동료들의 몹시도 코고는 소리를 들었고 이따금 그들의 다리가 옆 사람의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들이 비좁은 잠자리에서 서로 껴안기도 하고 어떤 놈은 팔을 벌리고 다가오는 상대방의 가슴패기를 힘껏 밀어버리기도 하는 모양을 자녀가 많은 어느 가난한 부친처럼 한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때 정철훈이 안쪽 잠자리에서 부스스 털고 일어났다. 그는 눈을 가렸던 수건을 걷어치우고는 잠자는 동료들을 건너뛰어 변소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변소에서 나온 정철훈이 이번에는 철창 옆에 서 있는 순열씨에게 다가왔다.
선생, 태우고 싶지 않소?
곁에 바싹 다가온 정철훈의 소리를 듣자, 순열씨는 졸음이 한꺼번에 달아난 듯 깜짝 놀란 눈으로 정철훈을 바라보았다.
지금 거기다가 강아지하고 대가리를 꽂아놓고 나왔소. 내가 대신 여기 서 있을 테니까 근무자 눈치 채지 않게 들어가서 태우고 나와요.
반신반의하는 순열씨의 태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철훈은 덤덤하게 말했다.
강아지는 아까 취침 전에 바닥나지 않았소?
이건 내가 데빡 몰래 비상용으로 감춰둔 거요. 난 변소 천정에 개인 조달창이 따루 있어요. 가서 실컷 태우고 나오슈, 한 마리 다.
순열씨는 변소로 들어가 노란 띠의 필터가 탈 때까지 미친 듯이 연기를 빨아댔다. 그는 자기에게 베풀어진 호의를 가늠할 겨를도 없이 흡연의 즐거움에 취해버렸고 이윽고는 현기증이 일어나 변소의 벽에 머리를 기대고 오랫동안 취기가 가시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불침번의 자리로 돌아왔다.
이젠 풀코스는 뛰기 힘들군요.
그가 말하자, 정철훈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선생은 아직 센 편이요. 데빡도 풀 코스를 뛰고 나면 비틀거린다구요.
정철훈은 자기가 깨어 있는 걸 근무자가 볼까봐 순열씨의 곁에 바짝 붙어섰다.
그런데 선생, 아까 일은 잊읍시다.
그는 근무자가 들을까봐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난 잊어버렸어요, 벌써.
그는 키가 작은 하사를 돌아다보며 역시 작은 소리로 대꾸했다.
그런데 선생, 내 상고 이유서를 못 보았죠?
그게 어딨어요?
저기 휴지통 안쪽에 끼워놓았어요.
그건 누가 쓴 거요? 당신이 쓴 거요?
아니오, 데빡이 써준 거요. 난 국졸이라 말할 줄도 모른다구요. 쓰는 것은 더구나 절벽이라구요… 내가 지금 상고중이라는 건 알지요? 난 이걸 써놓았지만 이번에도 보나마나 기각될 거니까 포기 상태였죠.
하지만 생각할수록 뭔가 이상하게 된 것 같다 이거요. 난 정말 억울하단 생각이 들어요. 난 14년 아니라 14일도 억울하단 생각이죠. 난 훈장을 다섯 개나 탔어요. 그 속에는 월남정부 것도 있죠. 내가 훈장을 많이 탔대서가 아니라 이 새끼들이 훈장을 줄 때는 언제고 여기 처넣을 때는 언제냐 이거요. 난 똑같은 적을 죽였을 뿐인데.
그렇지만 당신이 죽인 사람들이 적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겠소?
하, 그게 바루 까마귀들이 하는 소리라구요. 씨팔 내가 뒈져서 썩어버린 놈을 이거다 저거다 어떻게 증명해요?
하지만 선생은 내 애길 들어보면 알 거요.
그는 한숨을 폭 쉬고 나서 다시 말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