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정말 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참지 않고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순열씨는 그만 무안해져 슬그머니 벽 곁으로 물러앉았다.

 

그런데 선생, 당신 구라 좀 들어봅시다.

 

이때 중사가 다시 침묵을 깨뜨렸다.

 

난 알고 싶은 게 있다구. 당신 항명죄 얘기 좀 해보슈. 내일은 3호에서 강아지 대여섯 마리 올 거요. 그러니까 내일은 안심 폭 놓고 태우슈.

 

그 얘긴 재미없어요.

 

순열씨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렇지만 그는 아픈 데를 찔린 듯이 속으로 움찔 놀랐다. 그는 그곳이 자기의 치부라고 생각해왔고 지금도 그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뭘 그래, 당신 구라는 아무튼 재미있다구. 빼지 말아요.

 

중사는 쉽사리 단념하지 않았다.

 

순열씨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난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가지려고 한 것뿐이요. 이게 항명이라는 거요.

 

그 여자 말요?

 

말하자면 그렇죠.

 

순열씨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뭐가 그리 간단해요. 당신은 자꾸 빼는군.

 

아니에요. 이게 전부예요.

 

그는 중사의 찌푸린 얼굴을 향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것은 가질 수가 없다. 그것은 여기에 없다고 믿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그것을 가지려고 욕심을 낸 거죠. 말하자면 나는 선택을 해보려다 실패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선택의 결과가 이거였다 이겁니다.

 

순열씨는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해보였다.

 

난 당신 수작을 알 만해.

 

이때 갑자기 정철훈이 거들고 나섰다. 나는 죄가 없다. 억울하다 이거지. 너희들은 다 죄가 있지만 나만은 죄가 없다 이거지. 하지만 그따위 좆같은 수작은 귀가 시리도록 들었다 이거야. 사령부 교도소에 억울하지 않은 놈 하나 있는 줄 알어?

 

개기름이 흐르는 정철훈의 커다란 얼굴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난 죄가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난 죄가 있으니까 지금 여기 있는 거요.

 

그럼 그렇게 말하면 됐지 왜 선택이니 고정관념이니 어려운 얘기로 개수작 떠느냐 이거야. 난 하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 이거지? 그거 쪼다들이 하는 얘기라구. 난 내 맘 꼴리는 대로 했는데 뭘, 당신이 말하는 그 선택을 했다 이거야.

 

그는 의기양양하게 말하고는 자못 위압적인 눈초리로 순열씨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과 마주치자 순열씨는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내부에서는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경련이 일어났고 그것은 지금 그의 치부를 가렸던 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당신이 선택했다고?

 

순열씨는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래, 십사 년도 당신이 선택한 거요? 그렇지는 않겠지. 한마디로 당신은 쫓겨다녔을 뿐이요. 당신은 마치 옛날 왕십리에서 동대문까지,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 구루마를 끌고 쫓겨다녔듯이 그 이후로도 계속 쫓겨다녔단 말요.

 

당신은 흡사 궁지에 몰린 쥐새끼처럼 이리저리 쫓겨다니다가 이윽고는 함정에 빠졌다 이거요. 당신이 선택한 건 하나도 없다구. 당신은 이렇게 말했지? 나는 그 여자를 미워하지 않았는데 그 여자가 나를 증오하는 눈초리로 쏘아보길래 한 방 더 갈겼다구, 그것 봐요, 그건 충동에서 나온 행동이지 선택이 아니다 이거요. 당신은 실컷 쫓겨다니다가 함정에 빠진 거 아니오?

 

정철훈은 약간 질린 듯 한동안 말을 잃고 묵묵히 순열씨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무서운 인간이라는 것, 자기는 적의 빗발치는 탄환 앞에서도 별로 겁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순간 그는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인간을 다짜고짜 패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주먹을 부르쥐었다. 이때 그는 중사의 날카로운 늑대 눈이 그의 거동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가까스로 이 충동을 억눌렀다.

 

지금 뭐라고 했지? 당신 선생이면 단 줄 알어? 좆같은 소리로 사람 겁주려고 하는데, 난 지금은 당신이… 멋대로 지껄이게 내버려두겠어.

 

그는 낮은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했지만 그의 눈빛은 도끼를 든 백정의 그것처럼 살벌하고 험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