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비오는 일어서더니 짐 꾸러미에서 금술이 달린 빨간 모자(프랑스에서 경찰 모자라고 부르는)를 꺼내서 써보였다. 그 모자는 이마에서 5센티미터쯤 위에 총알 구멍이 나 있었다.
시리비오는 말을 이었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 기병연대에 근무하고 있었소. 짐작하겠지만, 나는 천성이 무엇에든지 으뜸이 되고싶었고, 남에게 지고 지낼 수가 없었소. 젊을 때부터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내 정열이었소. 당시에는 난폭한 것이 일종의 유행이었지. 그리고 난 우리 연대에서 난폭한 걸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군인이었소. 주량을 뽐내는 것도 그런 거라고 할 수 있을 거요."
"난 제니스 다비도프(*) 작품에도 나오는 그 쾌남아 부르초프(**)와 주량 대결을 벌여 이긴 적도 있었소. 우리 연대에서는 결투가 끊이질 않았고, 난 항상 그 많은 결투의 직접 당사자거나 입회인을 하곤 했지. 동료들은 나를 존경했지만 새로 부임해오는 연대장들에게는 내가 아주 귀찮은 골치 덩어리일 수밖에 없었소."
*제니스 다비도프(1774-1830) : 푸시킨 시대의 이류 시인. 군대 생활을 노래하고 그 환락을 구가하는 작품을 썼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부르초프(?-1813) : 프러시아 경기병 연대의 장교로서 다비도프의 동료였다.
"내가 여유만만하게(내심 불안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명성을 즐기고 있는 판에 어느날 어떤 돈 많고 쟁쟁한 가문의 청년 장교(이름은 말하고 싶지 않소)가 우리 연대로 부임해 왔소. 나는 생전 그런 행운아를 본 적이 없었소. 생각해 보시오! 젊고, 똑똑한데다, 미남이고, 성격도 명랑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용기를 가진 청년 장교 말이오. 가문이 쟁쟁한데다, 돈이 너무 많아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지. 단 한 번도 돈에 궁해 본 적이 없단 말이오!"
"이 사내가 우리 부대에 어떤 바람을 불러왔을지 한 번 상상을 해 보시오. 그 때까지 내가 누리던 왕좌는 당장 흔들리기 시작했소. 그는 부대에 퍼져있던 내 명성을 듣고 나와 사귀려고 했지만 나는 그를 냉정하게 대했지. 그랬더니 그는 아무 미련도 없이 나를 무시해 버리더군. 나는 그 놈을 미워했소. 부대원이나 여자들 사이에서 그 녀석이 인기를 독차지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거야. 나는 완전히 절망에 빠져서 녀석과 싸울 시비거리를 찾으려고 혈안이 됐소."
"내가 풍자시를 읊어 상대방을 조롱하면 녀석도 풍자시로 답을 하더군. 그런데 언제나 그의 풍자가 내 것보다 훨씬 기상천외하고 신랄했소. 그럼에도 그의 풍자는 비할 데 없이 명랑했단 말이오. 저쪽은 농담 삼아 했는데, 이쪽은 악의를 품고 약이 바짝 올라 있는 꼴이었소."
"드디어 어느 날 부근의 폴란드인 지주의 집에서 무도회에서 열렸소. 그가 거기 참석한 모든 귀부인들, 특히 내가 속으로 연모하고 있던 그 집 여주인의 주목을 받는 걸 보고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소. 나는 녀석의 귀에다 대고 야비한 농담을 퍼부었지. 그러자 녀석은 화를 버럭 내더니 내 뺨을 갈기더군. 우리는 동시에 샤벨을 움켜 쥐었고, 부인들이 기절하고, 온통 소동이 벌어졌어.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우리를 떼어놓았지만, 우린 당장 그날 밤 결투를 하러 나갔소."
"그때는 이미 새벽이 가까운 시간이었소. 나는 약속 장소에 세 사람의 입회인과 함께 나가서 그 친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소.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한 심정이었소. 봄의 태양이 솟아올라 사방이 따뜻해졌소. 멀리 그 친구가 오는 모습이 보이더군. 그는 입회인 한 사람과 함께 군복 밑으로 샤벨을 질질 끌면서 터벅터벅 걸어오더군. 우리는 그 쪽으로 마주 걸어갔소. 그는 버찌가 잔뜩 든 군모를 손에 들고 있었어. 입회인들이 12걸음을 쟀지. 내가 먼저 쏠 차례였소. 그러나, 가슴에 증오심이 끓어오르고 손이 말을 안 들어 정확하게 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소."
"그래서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을 얻기 위해 그 친구에게 먼저 쏘도록 양보했지만 듣지 않더군. 그래서 제비를 뽑기로 했지. 영원한 행운아인 그가 먼저 쏘게 되었소. 그는 겨냥을 하고 내 모자를 꿰뚫었어. 이제 내 차례가 되었지. 그의 목숨이 마침내 내 손아귀에 들어오게 된 셈이오. 나는 마치 굶주린 것처럼, 녀석의 표정에서 불안의 그림자를 잡아보려고 노려보았소... 녀석은 내 총구 앞에서 서서 군모에서 익은 버찌를 꺼내 먹으면서 씨를 뱉더군. 그 씨가 내게까지 날아오는 거야."
"그의 태연함에 나는 미칠 듯 분노했소. 놈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데 내가 그것을 빼앗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때 문득 악마 같은 생각이 내 머리에 번쩍였소. 나는 권총을 내렸지. 그리고 '당신은 지금 죽음 따위엔 무관심한 모양이군'하고 그에게 말했어. '당신은 아침 식사를 드시는 모양인데, 방해하고 싶지 않소...' '아니, 당신은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아요.' 놈은 대꾸했어. '사양하지 말고 쏘시오. 그런데 당신은 쏠 마음이 없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당신의 한 발은 아직 남아 있는 거요. 난 언제든지 명령을 받들 용의가 있어요.' 난 입회인더러 오늘은 쏠 생각이 없다고 밝혔소. 그것으로 그날 결투는 끝난 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