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있는 현실 그대로였어. 그래, 틀림없어. 그 안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사물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으니까 말이야. 내가 거의 잊어버릴 뻔했던 사랑하는 어머니, 엄격하고 강직한 아버지, 그리고 하녀, 유모, 내 집에 있었던 낯익은 물건들이 보였어. 그리고 현관과 문밖에 이리저리 마차들이 바쁘게 오가는 거리의 모습도 나타났어.
나는 그것을 보며 정말 놀랐네. 믿어지지가 않아서 새삼스럽게 그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지. 그리고 다시 페이지를 넘겨 여기저기 뛰어넘으면서 책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했어. 그리고 결국 길고 흰 벽, 초록색 문 바깥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주저하고 있는 내 모습까지 보게 되었네. 그리고 나는 그 갈등과 두려움을 다시 느끼게 되었지.
'그 다음은?' 난 이렇게 소리치면서 페이지를 넘기려고 했네. 그런데 그 엄숙한 여자의 차가운 손이 나를 가로막더군.
'그 다음은?' 난 이렇게 고집을 부리며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여자의 손가락을 잡아 떼서 밀어내려 했다네. 마침내 여자가 양보하더군. 그리고 내가 페이지를 넘기자 그 여자는 마치 그림자처럼 내 위로 머리를 수그리고 이마에다 키스를 했어."
"그러나 그 다음 페이지는 내게 그 황홀한 정원도, 표범도, 내 손을 붙잡고 인도해준 그 처녀도, 나와 헤어지기 싫어하던 그 친구들도 보여 주지 않았어. 오직 그 페이지는 웨스트켄싱턴 거리를 보여줄 뿐이었어. 아직 등불이 켜지기 전 싸늘한 저녁 시간의 길고 어두침침한 그 거리 말이야. 나는 바로 거기에 있었어. 작고 초라한 몰골로. 나는 울음을 참으려 애썼지만 그만 소리내서 엉엉 울고 말았다네.
내 등 뒤에서 '돌아와! 빨리 돌아와야 해!' 이렇게 소리치던 그 친구들 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슬퍼서 나는 울었던 거야. 그런데 그것은 책의 한 페이지가 아니었어. 냉혹한 현실이었어. 나는 거기 그렇게 내버려진 거지. 그 황홀하던 정원, 그리고 나를 가로막던 엄숙한 그 여자의 손도 모두 사라졌어… 도대체 다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불빛을 들여다보며 침묵을 지켰다.
"아!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그 비참함이라니…!" 그는 중얼거렸다.
"그래서?" 나는 잠시 기다렸다가 그를 재촉했다.
"난 정말 가련하고 불쌍한 아이였네! 이 회색빛 세상으로 되돌아왔다니 말이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게 되자 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기고 말았다네. 게다가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엉엉 울었다는 수치심과 굴욕감까지 맛보아야 했지. 그런 모습으로 겁에 질려 집에 돌아가야 했던 그 수치심과 굴욕감을 난 결코 잊을 수 없어.
금테 안경을 쓴, 마음씨 좋게 생긴 노신사가 걸음을 멈추고 들고 있던 우산으로 나를 쿡쿡 찌르면서 말을 건네더군. 그 얼굴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네. 그 사람이 이러는 거야. '딱하기도 하지. 길을 잃었나 보구나!' 다섯 살이나 먹은 런던 토박이인 나를 보고 글쎄 길을 잃었다니!
그 노신사는 친절하게 젊은 경관을 불러왔네. 어느새 사람이 주위에 모여들어서 함께 나를 집에까지 데리고 갔다네. 결국 나는 엉엉 울면서, 여러 사람들의 눈길을 온몸에 느끼면서 겁에 질려 우리 집 계단으로 돌아왔지. 그 황홀한 정원을 잃어버리고 말이야."
"그 정원, 아직도 나를 사로잡고 있는 그 정원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겨우 이 정도야. 그리고 물론 나는 그 정원에 떠돌던 느낌을 다 설명할 수는 없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투명한 듯한 비현실성, 보통 우리가 이 세상에서 느끼는 경험과 다른 특성에 대해서는 설명할 재간이 없어.
그러나 이것은 분명 사실이야. 분명 그런 일이, 바로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났던 거야. 만일 그것이 꿈이었다고 하더라도 아주 희한한 꿈이었지. 대낮에 꾸었던 별난 꿈이라고나 할까… 물론 나는 나중에 아주머니, 아버지, 유모, 가정교사 등등 온갖 사람들에게서 이것저것 질문을 받느라 시달려야 했지."
"나는 그들에게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네. 하지만 아버지는 난생 처음으로 내 종아리를 때리더군.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야. 나중에 아주머니에게도 그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했지만 또 다시 벌을 받았을 뿐이네. 내가 전혀 반성하지 않고 끝내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었어. 그리고 모두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마저 금지됐다네. 그래서 난 거기 대해 한마디도 할 수 없게 돼버렸어.
심지어 얼마 동안은 동화책마저 빼앗겼지… 내가 너무나 '공상적'이라는 이유였지. 뭐? 정말이라니깐. 정말 책들을 압수 당했어. 우리 아버지는 약간 고루한 데가 있어서… 결국 그 이야기는 나 혼자 마음에 간직할 수밖에 없었어. 나는 어린애처럼 눈물을 흘리며 내 배개에다 속삭이곤 했지. 덕분에 내 배개는 축축하게 젖어 짭짤한 맛이 나곤 했지.
그리고 나는 형식적이고 열성이 없는 기도 다음에 한 가지 진심에서 우러나온 소원을 덧붙이게 되었다네. '하나님, 제발 그 정원의 꿈을 꾸게 해 주세요. 아! 제발 저를 그 정원으로 데려가 주세요!'라고 말이야. 사실 그 정원의 꿈을 자주 꾸기도 했네. 그때마다 내가 처음에 겪은 것과 다르게 약간 더하거나 혹은 좀 바꾸었을지도 모르지…
자네도 짐작하겠지만 이 모든 것은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들을 가지고 아주 어렸을 때의 경험을 다시 구성하려는 것이네. 그러나 이 기억과 그 이후 내 어린 시절의 다른 기억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놓여 있어. 그러는 동안 그 놀라운 환상을 다시 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 그런 때가 왔다네…"
나는 뻔한 질문을 했다.
"아니야…" 그는 대답했다. "어렸을 때에는 그 정원으로 가는 길을 다시 찾으려고 했던 기억이 없어.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 일이지. 아마 이 사고가 있은 뒤부터는 내가 또 길을 잃을까봐 가족들이 내 행동을 더 엄격하게 감시했는지도 모르지.
내가 그 정원을 다시 찾으려고 했던 것은 사실 자네를 만났을 그 무렵쯤이었을 거야. 한때는 그 정원을 완전히 잊어버린 적도 있었다네. 물론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지만 말이야. 아마 그때가 여덟이나 아홉 살 무렵일 거야. 자네, 세인트 애설스턴즈 학교에서 내 어렸을 때 모습 기억하겠나?"
"물론이지."
"내가 그 무렵 무슨 비밀스러운 꿈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을 테지?"
담장의 문 - 4. 회색빛 세상으로 돌아오다니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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