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내 뒤에서 닫힌 그 순간부터 나는 그 길, 나뭇잎이 떨어져 있고 마차와 장사꾼들이 손수레를 몰고 다니고 있는 그 길을 깨끗이 잊어버렸어. 그뿐만이 아니었지. 집안의 규칙에 복종하도록 나를 끌어당기는 힘조차도 몽땅 사라져버렸지. 거기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나 두려움, 조심해야 하는 이 세상의 현실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지. 난 그런 것들을 완전히 잊어버린 거야.

나는 그 순간 즐겁고 행복에 가득 찬 새로운 세상에 사는 소년이 되었다네. 그것은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네. 햇빛은 더 따뜻했고 깊숙이 스며들면서도 더 부드러웠지. 주위의 공기에서는 투명하고 맑은 기쁨을 느낄 수 있었네. 파란 하늘에는 구름이 햇빛에 밝게 빛나며 둥실 떠 있었지… 내 눈앞에는 길고 넓은 길이 마치 나를 반겨주듯이 펼쳐져 있었네. 길 양쪽에는 잡초 하나 없는 화단이 있었고 거기에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지.

나는 전혀 무서워하지도 않고 내 작은 손으로 두 마리 큰 표범의 부드러운 털을 어루만졌어. 그리고 그 동그란 귀와, 귀 바로 아래 간지럼을 타는 부분까지 쓰다듬어 주었네. 그리고 표범들과 함께 뛰어 놀았어. 표범들은 마치 내가 집에 돌아온 것을 환영하는 것 같았어. 내 마음엔 집에 돌아왔다는 생각이 절실했다네.

문득 키가 큰 아름다운 처녀가 나타났어. 처녀는 웃으면서 나에게 다가와서는 '안녕?'하고 인사를 하더군. 그리곤 나를 들어올려 키스를 한 다음 내려놓고는 손을 잡고 어디론가 데려갔어. 그때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어. 다만 그런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즐거운 느낌이었지. 그 동안 무슨 이유론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행복한 일들을 기억해낸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길게 뻗은 참제비꽃 잎새 사이로 넓고 붉은 계단이 보이더군. 우리는 그 계단을 올라갔네. 그러자 울창한 고목들이 양쪽에 늘어선 길이 나타났네. 벌겋게 갈라진 이 고목들이 늘어선 가로수 길을 따라 대리석 의자와 석상들이 놓여 있더군. 잘 길들인 다정스런 흰 비둘기 떼가 있었다네…"

"그 처녀는 시원한 가로수 길을 따라 나를 데려갔다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또 뭔가 얘기도 해 주었어. 아주 재미있고 즐거운 이야기였던 건 분명한데, 그 내용을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어. 그때 그 처녀의 아름답고 상냥한 얼굴, 그 부드러운 윤곽, 섬세한 턱의 모양이 생각나는군…

갑자기 원숭이 한 마리가 나무에서 내려와 내 곁으로 달려왔네. 고동색 털에 순한 회색 눈을 가진, 깔끔한 카푸친 종류였어. 원숭이는 나를 올려다보며 즐거운 듯 온통 이를 드러내더니 금방 내 어깨로 뛰어 올라오더군. 이렇게 우리 두 사람은 무척 즐겁게 그 길을 걸어갔어."

그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재촉했다.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 기억이 나는군. 월계수 사이에 어떤 노인이 생각에 잠겨 있더군. 우리는 그 노인 옆을 지나, 작은 앵무새들이 즐겁게 지저귀는 곳을 지나갔네. 그리고 나서 넓고 그늘진 아케이드를 지나, 아주 넓고 시원한 궁전에 이르렀어. 그곳은 시원한 분수가 뿜어 나오고 아름다운 것들, 소망이 채워진다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었다네.

거기에는 온갖 물건과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저 어렴풋할 뿐이야.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아름답고 친절했어. 자세히는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들이 모두 무척 친절했다는 것, 내가 온 것을 무척 기뻐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어. 친절하게 나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이나 환영과 사랑의 뜻이 담긴 그 눈빛들…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네."

그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함께 놀 친구들을 봤다네. 난 그게 무척 기뻤다네. 그동안 나는 외톨이 소년처럼 지냈으니까. 그 애들은 잔디밭에서 즐겁게 뛰어놀고 있었네. 거기엔 꽃으로 장식한 해시계가 있었지. 함께 놀면서 우리는 무척 친해졌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기억에는 어떤 공백이 있어. 우리가 무슨 놀이를 하고 놀았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다는 걸세. 아무리 생각해보려고 해도 기억할 수가 없었어. 나중에 나는 몇 시간이고 눈물까지 흘리며 그 행복했던 - 그 놀이를 되새겨 보려고 애를 쓰기도 했어. 어린애다운 짓이었지.

나는 내 방에서 그 놀이를 혼자 다시 해 보고 싶었던 거야. 그러나 실패했어. 기억나는 것은 오직 그때의 행복감과, 그리고 나와 함께 놀았던 두 명의 친구뿐이었어…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침울하고 표정이 음산한 어떤 여자가 나타났어. 엄숙하고 창백한 얼굴에 꿈꾸는 듯한 눈을 한 침울한 여자였지. 그 여자는 연한 자주빛 긴 옷을 입고 책을 한 권 들고 있더군. 여자는 손짓으로 나를 부르더니 홀 위에 있는 화랑으로 데리고 가더군.

함께 놀던 친구들은 놀다가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채 나를 데려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어. 그들은 나와 헤어지기 싫었던지 '돌아와! 빨리 돌아와야 해!'하고 소리치더군. 나는 그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네. 그러나 그 여자는 친구들의 말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어. 그녀의 얼굴은 매우 부드러웠지만 엄숙했다네.

그녀는 나를 화랑의 어느 의자 쪽으로 데리고 갔어. 나는 그 여자 옆에 서서 그녀가 무릎 위에 책을 놓고 펼치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네. 그녀가 책을 펼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더군. 나는 깜짝 놀랐다네. 그건 살아 있는 책이었어. 그리고 거기서 나는 내 모습을 봤기 때문이야. 그것은 바로 내 자신에 관한 책이었어. 그 안에는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래 생겼던 일들이 모두 들어 있었어…"

"정말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었지. 그 책의 책장은 그림이 아니라 바로 현실 그대로였으니 말일세."

월리스는 말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그의 말을 과연 믿고 있는지 의심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어서 계속하게!" 나는 말했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