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닐 때에도 그는 항상 나보다 앞섰다. 별로 노력하지 않는데도 그랬다. 아마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타고난 것이리라. 우리는 웨스트켄싱턴에 있는 세인트 애설스턴즈 학교를 계속 함께 다녔다. 입학할 당시에는 그도 나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눈부신 실력으로 훌륭한 성적을 올려 나를 훨씬 앞질렀다.
물론 나 역시 그렇게 못하는 편은 아니었다. 내 기억에도 아마 남들 하는 만큼은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학교 시절에 나는 그 '담장의 문'에 대해 처음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세상을 뜨기 겨우 한 달 전에 두 번째로 그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이 '담장의 문'은 적어도 그에게는 현실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현실 세계의 벽을 지나 영원불멸의 진실에 이르는 그런 문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나도 그 점에 대해 상당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문은 그가 다섯 살이나 여섯 살 정도의 어린 아이였을 때 처음 그의 생활에 등장했다. 그가 이 얘기를 나에게 고백할 때의 표정과 태도가 떠오른다. 그는 천천히 엄숙한 표정으로 그 때가 언제쯤이었나를 진지하게 따지고 계산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거기엔 진홍색 담쟁이 덩굴이 있었네. 맑은 호박색 햇살이 비치는 하얀 담장이었네. 거기에 진홍색 담쟁이 덩굴이 선명하게 기어오르고 있었어. 어떻게 해서 이런 기억이 남아 있는지는 확실치가 않아. 하지만 어쨌든 그런 기억이 분명히 남아 있다네.
그리고 초록색 문 아래 깨끗한 도로 위에 상수리나무 잎이 떨어져 있었지. 나뭇잎들은 노랑과 초록으로 얼룩진 것이었지. 갈색이나 거무죽죽한 그런 색은 아니었어. 그러니까 아마 방금 떨어진 잎들이었겠지. 그런 것으로 보면 아마 시월쯤이었을 거야. 나는 해마다 나뭇잎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그게 맞을 거야."
"그러니까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난 그때 다섯 살하고 넉 달이 지났을 때였을 거야."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꽤 조숙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는 비정상적일 만큼 어린 나이에 벌써 말을 배웠다. 너무나 어른스럽고 분별이 있어서 그에게는 나이보다 이른 행동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었을 정도였다. 보통 아이들 같으면 그런 자유는 대개 일고여덟 살쯤 되어서야 주어지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두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 후에는 유모 겸 가정교사가 그를 돌보았다. 당연히 유모는 어머니보다는 주의를 덜 기울이고 엄격하지 않기 마련이었다. 부친은 일에 빠져 지내는 변호사였다. 엄격한 부친은 그에게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으나 또 한편으로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는 두뇌가 명석했으나 이 세상이 따분하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 때문에 어느 날 그는 집을 나와 길거리를 헤메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주의를 소홀히 한 탓에 집을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또 웨스트켄싱턴의 어떤 길로 걸어갔는지도 분명치 않다. 이 모든 것은 이제는 도저히 되살릴 수 없는 기억의 안개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졌다. 그러나 하얀 담장과 초록색 문만은 아주 뚜렷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 어린 시절의 기억에 의하면 그는 그 초록색 문을 처음 본 순간 다가가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이상한 욕망을 느꼈다고 한다. 그것은 무척 매력적인 감정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 유혹에 빠지는 것이 현명하지 못한, 또는 옳지 못한 행동이라는 확신도 분명히 느꼈다. 물론 그 둘 중 어느 쪽이라고 정확하게 짚어 말하기는 어려웠다.
한편 그의 기억에 따르면 그 문에는 분명히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당장에라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어린 소년이 한편으로 마음이 끌리면서도 다른 한편 주저하는 그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왜 그런지 이유를 분명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만일 그 문으로 들어가면 아버지가 무척 화를 낼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분명히 떠올랐다고 한다.
월리스는 망설이고 주저했던 그 순간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그 문 앞을 그냥 지나쳤다. 두 손을 호주머니에 쑤셔넣고 서투른 휘파람을 억지로 불어대면서 담장 끝까지 그대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보잘 것 없는 초라한 가게들이 여러 개 늘어서 있었다.
그 가게들 가운데 철물점 겸 도배장이 가게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 가게에는 토관, 함석판, 수도관, 벽지 견본, 에나멜 통 따위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물건들이 지저분하게 놓여 있었다. 그는 그 물건들을 구경하는 척하며 거기를 어슬렁거렸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초록색 문으로 가까이 가서 그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갑자기 그는 질풍 같은 감정에 휩싸였다. 그는 다시 망설이기 싫어서 그 초록색 문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곧장 초록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에서 문이 곧장 쾅하고 닫혀졌다. 그래서 그는 평생동안 그를 사로잡았던 그 정원으로 순식간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가 들어간 정원의 느낌을 남김없이 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아마 월리스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 정원에는 사람을 기뻐 들뜨게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경쾌함, 행복, 여유 있고 느긋한 느낌이 감돌고 있었다. 그곳의 광경은 선명한 색깔이었다. 흠이 없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그런 색깔이었다. 거기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오직 기쁘기만 했다. 이 세상에는 아주 드문, 우리가 어리고 즐거울 때에나 느낄 수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월리스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일세…" 그는 어쩐지 자신 없는 말투로 계속했다.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얘기를 할 때 망설이는 그런 태도였다.
"거기엔 커다란 표범이 두 마리 있었다네. 점이 있는 그런 표범 말이야. 그런데 나는 그 표범이 무섭지 않았어. 넓은 길이 길게 뻗어 있었지. 길 양쪽에는 대리석으로 가장자리를 두른 화단이 있었지. 그런데 거기에서 그 털가죽이 빌로드처럼 매끄러운 표범 두 마리가 공을 가지고 뛰놀고 있더군. 그중 한 마리가 호기심이 생기는지 고개를 치켜돌고 내게 다가오더군.
그놈은 곧장 내게로 달려왔네. 내가 조그마한 손을 내밀자 거기에 그 부드러운 둥근 귀를 조용히 비비는 거야. 그러면서 기분이 좋은지 목을 가르릉거리더군. 그래, 그것은 마법의 정원이었어. 그렇고 말고. 크기 말인가? 아아! 사방으로 온통 쭉 펼쳐져 있었네. 멀리 저쪽에는 언덕이 있었던 것 같아. 웨스트켄싱턴 따위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던 것 같아.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난 꼭 집에 돌아온 것 기분이었어."
담장의 문 - 2. 커다란 표범이 두 마리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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