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오넬 월리스가 '담장의 문'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준 것은 석 달 전쯤 어느 날 밤이었다. 서로 감추는 것 없이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그런 자리였다. 내가 듣기로는 그가 그 이야기를 꾸며낸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이야기하는 모습은 아주 솔직담백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내 아파트 방에서 잠이 깨자 상황이 달라졌다. 침대에 누워 그가 이야기한 것을 다시 생각해보자 그의 이야기 전체가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이미 주위의 분위기는 어제 저녁과 달랐다. 그의 진지하고도 느린 음성의 매력도 없었고, 갓을 씌운 탁자의 불빛 아래 우리를 은은하게 감싸주는 분위기도 없었다. 어제 저녁 그와 나 두 사람은 스탠드 불빛이 식탁을 비추는 가운데 그늘 속에 잠겨 저녁 식사를 하고 디저트를 먹었다. 유리잔, 식탁보, 냅킨 등이 모두 일상의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진 밝고 작은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모든 것이 사라지자 그가 한 얘기도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친구가 나를 놀려먹은 것이겠지!" 나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솜씨가 아주 대단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를 꾸며댈 줄은 생각도 못했지 뭐야…"
잠시 후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그가 들려준 얘기를 생각해 보았다. 물론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의 회상에는 어떤 현실감, 놀라울 정도로 생생한 현실감이 담겨 있었다.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그것은 나름대로 그의 경험을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그런 방식이 아니면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체험을 암시하거나 제시하거나 혹은 전달하려 했던 것 아닐까.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분명치는 않지만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설명하고 싶지 않다. 한때 품었던 의심을 이제 완전히 털어버린 것이다. 이야기를 들을 당시 그랬던 것처럼 나는 월리스가 해준 얘기를 사실로 믿고 있다. 그때 월리스는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나에게 진실을 들려주었다는 점을 이제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잘 알 수가 없다. 그가 정말 본 것이 정말 사실인지, 아니면 그저 보았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말이다. 그는 엄청난 특권을 가진 인물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환상적인 꿈에 의해 희생 당한 것일까… 나로서는 추측조차 할 수 없다. 나의 의혹은 그의 죽음과 함께 영원한 미궁 속으로 빠져버렸다. 그의 죽음에 대해 여러 가지로 조사한다고 해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전적으로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는 문제인 셈이다.
그는 무척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마 내가 무심코 어떤 말이나 비판을 꺼낸 탓에 그 친구가 비밀을 털어놓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는 당시 벌어졌던 대규모 사회 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었다. 나는 그의 행동에 실망, 그 운동이 느슨한데다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그는 거기 대해 뭔가 변명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그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사실은 뭔가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게 있다네."
그는 조금 있다가 말을 계속했다. "사실 내가 게을렀다는 것은 분명하네. 사실은, 귀신이나 영혼 따위도 아니고… 그게 참 말하기 애매한 문제인데 말일세, 레드먼드, 그러니까 나는 뭔가에 홀린 셈이야. 내가 홀려 있는 그 무언가, 그것 때문에 다른 모든 사물은 광채를 잃고 만다네. 내 마음이 그 뭔가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영국인 특유의 수줍음 때문이었다. 뭔가 감동적인 것, 중대한 일, 또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러한 수줍음은 흔히 우리를 압도하곤 한다. 그것 때문에 그도 말문이 막혔던 것이다.
"자네도 세인트 애설스턴즈 학교를 계속 다녔지?"
그가 말했다. 이것은 그가 앞서 꺼냈던 얘기와는 전혀 무관한, 뚱딴지 같은 소리처럼 들렸다.
"그런데 말일세…" 그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말을 멈추었다. 그는 얘기를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무척 더듬거렸지만 차차 말을 이어가는 것이 쉬워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는 자기 인생의 숨은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갖가지 동경으로 가득 찬 얘기였다. 그 동경은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워왔던 것이다. 그 동경 때문에 이 세상의 온갖 흥미와 볼거리마저도 싱겁고 지루하고 헛된 것처럼 보였으리라. 그만큼 그의 추억담은 아름다움과 행복으로 가득찬 것이었다.
이제 그 이야기에 대한 실마리가 어느 정도 풀린 상황에서 생각해보니, 그때 그의 얼굴에는 모든 것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의 사진을 한 장 갖고 있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한 그의 표정이 잘 나타나 있는 그런 사진이다. 그 사진을 보면 한때 그를 몹시 사랑했던 어떤 여인이 그에 대해서 한 말이 생각난다.
"그는 갑자기 흥미를 잃어버리곤 했지요. 앞에 상대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곤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조차 전혀 거들떠보지 않게 된답니다…"
그러나 월리스가 세상사 모든 것에 전혀 흥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어떤 일에 주의를 집중하기만 하면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의 인 생은 갖가지 성공 사례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나보다 훨씬 앞서 나갔다. 내 머리 저 위로 날아올라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출세 가도를 달린 사람이다. 그는 아직 서른 아홉 살에 불과했다. 하지만 만일 살아 있었다면 그는 관직에 머물러 새로운 내각에서도 각료로 임명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다들 하는 얘기였다.
담장의 문 - 1. 동경으로 가득 찬 얘기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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