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병들은 전혀 예측도 못하고 대비도 못했기에 미처 손을 쓸 수 없었다. 적들은 몸에 갑옷도 입지 못하고 손에 총을 들지도 못한 채 서로 밀치고 밟으며, 산과 들로 흩어져 달아나므로 우리는 파죽지세로 그들을 추격했다.

 

이윽고 동이 텄다. 적병은 그때서야 우리의 군사력이 약하고 수효가 적은 것을 알아차리고 사면에서 포위한 채 공격했다. 이제는 거꾸로 우리의 전세가 지극히 위급해져서 좌충우돌해 보았으나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포성이 크게 울리며 한 부대 군사들이 공격해 오자, 적병은 다시 크게 놀라 달아났다. 마침내 적의 포위망이 풀렸고, 우리는 용케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바로 본진의 후원병들이 몰려와서 적과 접전을 벌인 것이었다.

 

우리 선봉대와 본진이 합세해 추격하자, 적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멀리 도망갔다. 전리품을 거두어 보니 총기와 탄약이 수십 바리요, 말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으며, 군량미가 1000여 포대나 됐다.

 

적병의 사상자는 수십 명이었으나 우리의 의병들은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었다.

 

우리는 하늘의 은혜에 감사하고 만세를 세 번 부르며 본래의 마을로 개선해 황해도의 관찰부에 급히 승전 보고했다. 당시 일본 하급 장교인 스즈키란 자가 군대를 이끌고 지나가다 우리가 동학당에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신을 보내어 축하의 뜻을 표한 적이 있었다.

 

이후 적병들은 소문을 듣고 멀리 달아나 다시는 더 싸움이 없었고, 차츰 잠잠해져서 나라 안이 다시 태평해졌다.

 

나는 그 싸움 뒤에 무서운 병에 걸려 몇 달을 고통스럽게 보낸 끝에 겨우 죽음을 면하고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15년 동안 조그만 질병도 한 번 앓지 않았다.

 

아! 토끼 사냥이 끝나면 공을 세운 사냥개마저도 잡아먹으려 들고, 내를 건너갈 적에 요긴하게 쓴 지팡이도 건너가서는 모래바닥에 내동댕이친다더니 그게 사실이었다. 이듬해인 1895년 여름에 손님 두 사람이 찾아와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작년에 귀하가 전리품으로 얻은 1000여 포대의 군량미는 원래 동학당들의 물건이 아니었소. 본래 그 절반은 지금의 탁지부 대신 어윤중 씨가 사두었던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전직 선혜청 당상 민영준 씨가 농장에서 추수한 곡식이니 지체하지 말고 원래의 수량대로 돌려 드리도록 하시오.”

 

아버지는 웃으며 대답했다.

 

“어씨, 민씨, 두 분의 쌀은 내가 알 바 아니오. 그것은 우리가 동학당의 진중에 있던 것을 빼앗아 온 것이니, 당신들은 다시는 그런 무리한 말을 하지 마시오.”

 

그러자 두 사람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냥 돌아갔다.

 

그 일이 그렇게 끝난 줄 알았는데, 하루는 경성에서 급한 편지 한 장이 왔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금 탁지부 대신 어윤중과 민영준 두 사람이 곡식 포대를 잃어버렸다면서 그것을 찾을 욕심으로 황제 폐하께 죄 없는 당신을 고자질했소. 즉 ‘안 모라는 사람이 막중한 국고금과 무역을 해서 사들인 쌀 1000여 포대를 허가 없이 도둑질해 먹었기에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니, 그 쌀로 수천 명의 병사를 길러서 음모를 꾸미려 하고 있습니다. 만일 군대를 보내어 진압하지 않으면 국가에 큰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모함입니다. 곧 군대를 파견하려 하고 있으니 빨리 경성으로 올라와 앞뒤 방책을 꾀하도록 하시오.”〔전 판결사 김종한의 편지〕

 

아버지는 그 편지를 읽고 곧 길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 알아 보니 과연 현실이 그 말과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법관에게 사실을 호소하고, 재판도 서너 차례 했으나 끝내 판결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김종한 씨가 정부에 이렇게 건의했다.

 

“안 모 씨는 본래 도적의 무리가 아닐뿐더러 의병을 일으켜 도적들을 무찌른 국가의 큰 공신이니 마땅히 그 공훈을 표창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비슷하지도 당치도 않은 말로써 그 사람을 이렇게 모함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