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 음력 7월 16일. 대한민국 황해도 해주의 수양산 아래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으니, 성은 안(安)이요, 이름은 중근(重根), 별명은 응칠(應七)이라고 했다. 성질이 가볍고 급한 편이므로 이름을 중근이라고 하고, 배와 가슴에 검은 점이 일곱 개가 있어 별명이 응칠이라고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성함은 안인수(安仁壽)였다. 그분은 성품이 어질고 덕이 많은 분이었으며, 살림이 넉넉해 자선가로서도 도내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일찍이 진해현감을 지냈으며 6남3녀를 뒀다. 여섯 아들은 장남 태진, 차남 태현, 3남 태훈(泰勳·나의 아버지), 4남 태건, 5남 태민, 6남 태순이었다.
여섯 형제는 모두 글을 썩 잘하고 살림도 넉넉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셋째인 나의 아버지는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 여덟아홉 살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했고, 열세너 살 때 과거 공부와 사륙병려체(四六騈麗體·대구를 써서 문장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문체)를 익혔다.
아버지께서 통감을 읽을 때 선생이 책을 펴고 글자 하나를 가리키며 물어보았다.
“이 글자에서부터 열 장 뒤에 있는 글자가 무슨 글자인지 알겠느냐?”
아버지께서는 마음속으로 생각하시다가 대답했다.
“알 수 있습니다. 필시 천(天)자일 것입니다.”
들춰보았더니 과연 그 말대로 천(天)자였다.
“이 책을 거슬러 올라가도 알 수 있겠느냐?”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다시
“예! 알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렇게 시험해 묻기를 십여 차례 했으나 바로 하거나 거꾸로 하거나 마찬가지로 전혀 착오가 없었다. 이를 보고 듣는 사람들 모두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선동(仙童)이라 일컬었다. 그로부터 소문이 널리 퍼져 알려졌다.
아버지는 중년에 과거에 올라 진사가 되고, 조씨(趙氏)에게 장가들어 배필을 삼아 3남1녀를 낳으니 맏이는 중근(重根), 둘째는 정근(定根), 셋째는 공근(恭根)이었다.
아버지가 1884년 갑신년에 한성에 가서 머물 때였다. 당시 박영효 씨는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고 어지러운 것을 깊이 걱정해 정부를 혁신하고 국민들을 개명시키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그는 준수한 청년 70명을 선정해 외국으로 보내 유학시키려 했는데, 아버지도 거기에 뽑혔다.
그런데 슬프게도 정부의 간신배들이 사리에 맞지 않게 박씨가 반역하려 한다고 모함해 병정을 보내 그를 잡으려 했다. 그러자 박씨는 일본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그의 동지와 학생들은 더러 살육도 당하고, 혹은 붙잡혀 멀리 귀양을 가기도 했다.
나의 아버지는 몸을 피해 달아나 고향집으로 돌아와 숨어 살면서 할아버지와 서로 의논했다.
“나라가 날로 잘못돼 가니, 부귀공명은 바랄 것이 못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