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중 하루는 아버지는 “일찌감치 산에 들어가 살면서 구름 아래 밭이나 갈고, 달밤에 고기나 낚으며 세상을 마치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이윽고 아버지는 집안 살림을 모두 팔고 재산을 정리했다. 그리고 마차를 준비해 무려 70~80명이나 되는 대가족을 이끌고 신천군 청계동의 산중으로 이주했다.

 

그곳은 지형은 험준하나 논밭이 제대로 갖추어 있고, 산수경치가 아름다워 그야말로 별유천지(別有天地)라 할 만했다. 그때 내 나이는 예닐곱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한문학교에 들어가 8~9년 동안 겨우 보통학문을 익혔다.

 

내가 열네 살 되던 무렵 조부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사랑으로 감싸주시며 길러 주시던 할아버지의 정을 잊을 수 없었고, 너무 슬픈 나머지 병을 얻어 심하게 앓다가 반년이 지난 후에 겨우 회복됐다.

 

나는 어려서부터 특히 사냥을 즐겨했다. 언제나 사냥꾼을 따라다니며 산과 들에서 사냥하며 다녔다. 차츰 장성해서는 총을 메고 산에 올라 새와 짐승들을 사냥하느라 학문에는 그다지 힘쓰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와 선생들이 나를 엄하게 꾸짖기도 했으나 끝내 복종하지 않았다.

 

어느 날 친한 친구 학생들이 나를 타이르며 권고했다. 

 

“너의 부친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는데, 너는 어째서 무식하고 하찮은 인간이 되려고 하느냐?”

 

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너희들 말도 옳다. 그러나 내 말도 좀 들어봐라. 옛날 초패왕 항우(楚覇王 項羽)가 말하기를 ‘글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그만이다.’라고 했다. 그랬는데도 만고영웅 초패왕의 명예가 오히려 천추에 길이 남아 전한다. 나도 학문을 가지고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초패왕도 장부고 나도 장부다. 너희들은 다시 내게 학업을 권하지 말라.”

 

어느 해 3월 화창한 봄날이었다. 학생들과 함께 산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다가 깎아지른 듯 험한 바위가 겹겹이 쌓인 절벽 위에 이르렀다. 꽃이 너무도 탐스러워 그것을 꺾으려고 몸을 숙이는 순간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다. 수십 척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몸은 굴렀으나 정신을 가다듬어 마침 나무 한 그루가 있는 것이 보이기에 손을 내밀어 그것을 움켜쥐었다. 겨우 몸을 바로잡아 용기를 내어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았다. 만일 서너 자만 더 아래로 떨어졌더라면 수백 척 벼랑 아래로 떨어져 뼈는 부스러지고 몸은 가루가 돼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을 뻔했다.

 

여러 친구는 산 위에 서서 얼굴이 흙빛이 돼 벼랑 위에 서 있다가 내가 무사한 것을 보고는 밧줄을 내려서 나를 끌어올려 주었다. 나는 몸에 상처가 한 군데도 없었고, 다만 등에 땀만 흠뻑 젖었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기뻐하며, 하늘이 목숨을 살려준 것에 감사하면서 산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내가 위험한 처지에서 죽음을 모면한 첫 번째 경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