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내 나이 16세에 아내 김아려에게 장가들었다. 현재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 무렵 한국 각 지방에서는 이른바 동학당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들은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군현을 가로질러 다니면서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다. 이것이 이후 우리나라를 위태롭게 한 바탕이 됐으며, 일본·청국·러시아가 우리나라에서 전쟁하게 된 원인이 됐다.

 

관군은 그들을 진압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청국 군인들이 들어오고 또 일본 군인들도 건너와 일본과 청국 두 나라가 서로 충돌해 마침내 큰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당시 나의 아버지는 동학당의 폭행을 견디기 어려워 동지들을 모으고, 격문을 뿌려 의병을 일으켰다. 나아가 포수들을 불러 모으고, 처자들까지 대열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모인 정예 병력은 70여 명이 됐으며, 이들은 청계산 속에 진을 치고 동학당에 항거했다.

 

그때 동학당의 괴수 원용일이란 자가 2만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기세도 당당하게 쳐들어 왔다. 동학당의 깃발과 창칼이 햇빛을 가리고 북소리·호각소리·고함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우리 측 의병은 그 수가 70여 명밖에 되지 않아 동학당과 비교하면 그 세력의 강하고 약함이 마치 계란을 갖고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의병들 중에는 마음속으로 겁을 먹고 어찌할 줄 몰라 하는 자가 많았다.

 

때는 1894년 12월 한겨울이었다. 갑자기 동풍이 불고 큰 비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게 됐다. 적병인 동학군은 갑옷이 모두 젖어 찬 기운이 몸에 스며들자 별 도리 없이 10리쯤 떨어진 마을로 후퇴해 밤을 지내려고 했다.

 

그날 밤 아버지께서는 여러 장수를 모아 놓고 의논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단을 내렸다.

 

“만일 내일까지 이 자리에 앉은 채로 적병의 포위 공격을 받게 되면, 우리 소수의 군사로는 많은 적병에 대항해 싸우지 못할 것이 뻔하다. 그러니 오늘밤 기습작전으로 적을 선제공격하는 길밖에 없다.”

 

닭이 울자 새벽밥을 지어 먹은 후, 아버지는 정병 40명을 뽑아 출발시키고 남은 병정들은 본진을 수비하게 했다. 그때 나는 동지 6명과 함께 자원했다. 나는 선봉 겸 정탐 독립대가 돼 맨 앞에서 수색하면서 적병의 대장이 있는 곳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숲속에 엎드려 숨어서 적진의 형세와 동정을 살펴보니, 깃발이 바람에 휘날려 펄럭이고 불빛이 하늘로 치솟아 대낮과 같았다. 사람과 말들은 소란해 도무지 기강과 규율이 없었다.

 

나는 동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만일 지금 적진을 습격하기만 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오.”

 

그러나 모두들 회의적이었다.

 

“얼마 안 되는 소수의 군사로 어찌 적의 수만 대군을 대적할 수 있겠소?”

 

나는 다시 대답했다.

 

“그렇지 않소. 병법에 이르기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고 했소. 내가 적의 형세를 보니 오합지졸이 모인 질서 없는 무리일 뿐이오. 우리 일곱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기만 하면 반란을 일으킨 저 같은 무리들은 비록 백만 대군이라 해도 겁날 것 없소이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으니 불시에 쳐들어 가면 파죽지세가 될 것이오. 그러니 그대들은 망설이지 말고 내 작전에 따르시오.”

 

모두들 내 의견에 동조해 우리는 완전한 계획을 세웠다. 나의 우레와 같은 호령 한마디에 일곱 사람이 일제히 적의 대장이 있는 곳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포성은 벼락처럼 천지를 뒤흔들고, 탄환은 우박처럼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