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그 겨울은 어쩌면 그리도 길고 황량했을까!
오두막집엔 크리스마스 무렵부터 양식이 떨어져 가게에서 밀가루를 사와야 했다. 키리야크는 이제 늘상 집에 붙어 있으면서 밤이면 밤마다 행패를 부려서 온 집안 식구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러다가도 아침만 되면 민망하고 골치가 쑤시는 탓에 옆에서 보기가 딱할 정도로 괴로워했다.
가축 우리에서는 굶주린 암소가 끊임없이 울어댔다. 할매와 마리아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을 후벼파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일부러 사람들을 골탕먹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혹독한 추위가 몰려왔다. 타는 불길마저 얼어붙을 것 같은, 지독한 추위였다. 쌓인 눈이 얼어붙어서 여기저기 산더미처럼 솟아올랐다. 이 겨울은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수태고지 절기에는 본격적인 겨울 눈보라가 몰아쳤다. 부활절에도 눈이 내렸다.
그러나 지루하던 겨울도 결국 물러갔다. 4월 초에는 낮에는 따뜻하고 밤에는 추운 날씨가 계속 이어졌다. 겨울은 끈덕지게 버티고 있었다. 그래도 결국 어느 따뜻한 날이 겨울을 물리쳤다... 드디어 시냇물이 흐르고, 새들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냇물 옆 초원과 수풀이 흠뻑 봄 물을 머금고 주코버 마을과 강 건너 마을 사이의 넓은 땅은 벌써 거대한 물결 속에 잠기고 있었다.
하늘에선 물오리가 여기저기 떼를 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저녁마다 불타오르는 석양이 구름 가운데서 아름다운 광경을 펼쳐 보였다. 그 모습은 너무 화려하고 신비롭고 아름다워서 마치 사실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두루미는 화살처럼 날으면서 사람의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처량한 목소리로 울어댔다. 오리가는 비탈에 서서 들판에 넘쳐 흐르는 물과 태양, 반짝반짝 빛나며 마치 새로 태어나 젊어진 것 같은 교회의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곤 했다. 그녀의 가슴 속에는 어디든 발 닿는대로 이 세상 끝까지 가버리고 싶은 생각이 복받쳐 올랐다. 그럴 때면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해지며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모스크바로 올라가 하녀 자리를 구해볼 생각이었다. 키리야크도 함께 올라가 문지기가 됐건, 머슴이 됐건 남의 집 살이를 하기로 얘기가 되어 있었다. 아아, 하루라도 빨리 이 곳을 떠나버리고 싶다...
길이 마르고 날씨가 따뜻해지자 그들은 길 떠날 준비를 했다. 오리가와 사샤는 자루를 짊어지고 나막신을 신고 새벽에 길을 떠났다. 마리아도 두 사람을 전송하려고 함께 길을 나섰다. 키리야크는 몸이 좋지 않아서 1 주일 쯤 지나서 떠날 작정이었다.
오리가는 죽은 남편을 생각하여 교회를 향해 마지막으로 기도를 드렸다. 울지는 않았지만 그러는 그녀의 얼굴은 주름이 잡히고 겉늙어서 마치 나이 많은 할머니 같았다. 지난 겨울 동안 그녀는 몸이 야위고 늙어버렸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도 눈에 띄게 늘었다.
옛날의 보기 좋던 미소와 애교는 사라지고 그 대신 쓰라린 일을 겪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비탄을 인내하는 서글픈 표정이 두드려졌다. 눈에도 뿌옇고 멍청한 표정이 깃들여 마치 바보 같기도 했다.
그녀는 이 시골 마을과 농사꾼들과 헤어지는 것이 서글펐다. 그녀는 니콜라이를 묻던 때를 떠올렸다. 집집마다 부조를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모두들 그녀의 슬픔을 동정하고 함께 울어주었던 일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지난 여름과 겨울을 보내는 동안 이곳 사람들은 짐승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게 두려웠던 일도 많았다. 그들은 사납고, 정직하지 않으며, 지저분한데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도 않고 늘 싸우기만 한다. 그 이유는 뭘까? 서로 존경할 줄을 모르고 두려워하고,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술집을 만들어 농사꾼들을 주정꾼으로 만든 사람이 누군가? 바로 농사꾼이다. 마을의 조합이나 학교나 교회의 돈을 축내고 술로 바꿔서 마셔버리는 사람이 누군가? 바로 농사꾼이다. 이웃집의 물건을 훔치고 불을 지르고 보드카 한 병 때문에 법원에서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은 또 누구인가? 바로 농사꾼이다.
지방 자치회나 다른 모임에서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농사꾼의 이익을 반대하고 설쳐대는 사람은 누구인가? 역시 농사꾼이다. 그렇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정말 싫고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사람이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괴로워하기도 하고, 눈물도 흘린다. 그리고 이런 온갖 악덕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활 가운데 변명할 수 없는 행위는 없다.
고달픈 노동 때문에 매일 저녁마다 사지가 쑤시고 아프다. 겨울 날씨는 혹독하리만큼 춥고, 수확은 보잘 것 없다. 사는 오두막은 좁고 답답하다. 이런 것들 가운데서 그들을 구원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뭔가 나아지리라는 희망조차 없는 것이다. 그들보다 부유하고 힘이 센 사람들은 그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들 스스로가 야만스럽고 부정직하고 주정뱅이이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똑같이 더러운 쌍소리를 내뱉어가며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보잘 것 없는 말단 공무원이나 가게 심부름꾼마저도 농사꾼이라면 마치 부랑자를 대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인다. 마을의 늙은이나 교회의 장로가 되어도 소용이 없다. 사람들은 서슴없이 그들을 '너'라고 부른다. 마치 자기들에겐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게다가 이따금 마을에 찾아오는 그 욕심 사납고 방탕하고 무뢰하기 짝이 없는 무리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오로지 농사꾼들을 모욕하고 착취하고 위협하기 위해서 마을을 찾아오는 것이다.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도움이나 기대할 것이 있단 말인가?
오리가는 지난 겨울에 키리야크가 태형(笞刑)을 받으러 끌려갈 때 할배가 짓던 그 표정을 생각해 보았다. 얼마나 무참하고, 비굴한 표정이었던가... 그리고 이제 그녀는 이 모든 사람들이 불쌍하고 애처롭게만 여겨졌다. 그녀는 길을 걸으면서도 농사꾼들의 허름한 오두막집들을 계속 돌아보았다.
마리아는 십 여 베르스따 쯤 배웅을 하더니 드디어 작별 인사를 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바닥에 비벼대며 큰 소리로 울음을 토해냈다.
"아이고, 아이고... 나는 이제 또 외톨이란 말이여! 어째서 내 신세는 요 모양 요 꼴이냔 말여! 어째서 이렇게 처량하고, 기구하냔 말이여!"
그녀는 오랫동안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오리가와 사샤는 한참 동안 마리아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몇 번이나 거듭거듭 앞을 바라보면서 무엇엔가 절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머리 위로 주둥이가 하얀 까마귀가 높게 날고 있었다.
해가 높이 솟아올라 이제 공기가 더워졌다. 주코버 마을에서도 이제 멀리 왔다. 오리가와 사샤는 걷는 것이 즐거워서 금방 마을이고 마리아고 다 잊어 버렸다. 둘은 기분이 흥겨워져서 듣는 것, 보는 것이 모두 기쁘기만 했다. 길가의 오래된 무덤, 줄지어 선 전봇대 따위도 흥겹기만 하다. 전봇대는 한 자루 한 자루 끊임없이 이어져 저 멀리 지평선 끝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전기 줄은 윙윙 신기한 소리를 낸다.
어쩔 때는 멀리 파란 수풀에 아늑하게 싸인 농가가 보이고, 눅눅한 바람과 삼베 삶는 냄새가 풍겨오기도 한다. 그러면 그곳에는 어쩐지 행복한 사람들만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들판 가운데에 하얗게 색이 바랜 말 뼈다귀를 하나 보는 일도 있었다. 종달새는 끊임없이 지저귀고, 뜸부기는 서로서로 짝을 불러댄다. 물새는 마치 누군가 헌 쇠고리를 달각거리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울어댄다.
정오쯤 되어 오리가와 사샤는 커다란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넓은 거리에서 두 사람은 주코버 장군 댁의 요리사였던 키 작은 늙은이와 마주쳤다. 날씨가 무척 더워 그의 대머리는 땀에 젖고 시뻘개져서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오리가와 그 할배는 처음에 서로 몰라보고 그냥 지나쳤다가 둘이서 동시에 서로 돌아보고 얼굴을 알아봤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한 마디도 건네지 않고 제각기 걸음만 재촉했다.
오리가는 다른 집들에 비해 그래도 비교적 살림살이가 나아 보이는 새로 지은 어떤 농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집의 활짝 열어젖힌 창문 앞에서 공손하게 절을 하고, 가늘게 목청을 뽑아 마치 노래라도 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교를 믿으시는 분들이시여, 예수님을 보시와 저희를 도와주세요. 당신의 적선 덕으로 부모님들은 천국에 가시고 영원히 평안을 맛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정교를 믿으시는 분들이시여!" 사샤도 따라 했다. "예수님을 보시와 저희를 도와주세요. 당신의 적선 덕으로 부모님들은 천국에..."
<끝>
농사꾼 - 14. 떠나는 사람들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페이지 15 / 전체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