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이 하늘과 땅 사이에는 공허가 없으며 부자도 권력자도 이 모든 것을 앗아가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흔연히 인정하게 된다. 부당한 모욕이나 노예처럼 짓눌려 지내는 것,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고 괴로운 가난, 끔찍한 보드카...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힘이 뚜렷이 계신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는 것이다.
"우리들의 수호신인 성모님이시여!" 마리아는 감격에 겨워 흐느껴 울었다.
"성모님!"
그러나 성모상을 맞이하는 행사가 끝나고 성모상이 다른 마을로 가 버리자 모든 것은 다시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술집에서는 여전히 주정뱅이들이 꼬부라진 혀로 막되 먹은 얘기를 지껄여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자 집 사람들 뿐이었다. 그들은 실상 부자가 될수록 하나님을 믿고 영혼의 구원을 믿는 마음이 엷어졌다. 다만 이 지상의 풍부한 물질을 누리는 생활이 끝나는 것이 두려운 것일 뿐이다. 그래서 촛불을 켜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농사꾼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할매와 할배 눈앞에서도 사람들은 그 동안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 죽어도 괜찮은 때가 되었다고 서슴없이 얘기했다. 할매와 할배 역시 그런 얘기에 대해 골을 내거나 하지 않았다. 이들 가난한 농사꾼들은 니콜라이 앞에서도 그런 얘기를 꺼리지 않았다. 표쿠라에게 '니콜라이가 죽을 때쯤이면 남편인 데니스도 군대를 마치고 나올 것'이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특히 마리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 자식들이 죽으면 오히려 좋아했다. 왜 지금까지 죽음이 찾아오지 않았는지 서운하게 여길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병에 걸리는 것만은 기이할 정도로 지나치게 부풀려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할매는 소화가 잘 되지 않거나 가볍게 몸에 오한이 들거나 하는 아주 가벼운 증세에도 엄살을 부렸다. 자리에 곧장 드러누워 담요를 뒤집어쓰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죽을 것만 같다고 야단을 치곤 했다. 그러면 할배는 허둥지둥 사제를 불러다가 할매에게 성찬식을 시키고 성유(聖油)를 바르곤 했다.
농사꾼들은 모여 앉기만 하면 감기나 회충 따위 얘기를 했다. 처음에는 그냥 뱃속에서 굴러다니다가 마지막에는 심장으로까지 밀고 올라간다는 종기 얘기도 빠지지 않았다. 특히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감기다. 그들은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고 한여름에도 옷을 두껍게 자기를 좋아했다.
할매는 의사에게 보이는 것을 좋아해 걸핏하면 병원으로 쫓아갔다. 그리고 병원에 가면 으레 자기 나이가 일흔이 아니고 쉰 다섯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있는 그대로 일흔 살이라고 a말했다가는 의사가 고쳐주려고 하지 않고 이제 너는 죽어도 좋을 나이라고 윽박지를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할매는 병원에 갈 때면 으레 계집애들 두 셋을 데리고 아침 일찍 출발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에야 자기가 먹을 물약과 계집애들에게 발라 줄 고약을 받아들고 돌아오곤 한다. 그러면서 배가 고파 잔뜩 역정을 내곤 했다.
한 번은 니콜라이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그 후 한 두 주일 동안은 니콜라이도 받아온 물약을 마시고 꽤 나아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할매는 마을 주위 30 베르스따 이내의 의사나 점장이는 모르는 사람 없이 줄줄이 꿰고 있었으나 그 가운데 마음에 드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성모제 때 사제가 십자가를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닐 때였다. 함께 다니던 교회 사람이 할매에게 읍내 감옥 근처에 사는 노인네가 무척 용하니 가보라고 권했다. 그 노인은 군대에서 군의관의 조수로 일하던 사람이었다. 할매는 그 말을 듣고 그 노인에게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첫눈이 오던 날, 할매는 읍내로 들어가 그 노인네를 데려왔다. 힘줄이 울퉁불퉁 솟은 덥수룩한 얼굴에 소매가 긴 프록코트를 입은 노인네였다. 마침 그때 오두막집에서는 날품팔이 일꾼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지독하게 도수가 높은 돋보기를 낀 늙은 양복공이 넝마 조각을 붙여 조끼를 만들고, 두 명의 젊은이는 가죽으로 펠트 신발을 만들고 있었다. 술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키리야크는 늙은 양복공 옆에서 마구(馬具)를 손질하고 있었다.
오두막집은 비좁고 답답했다. 역겨운 냄새도 풍겼다. 읍내에서 온 노인은 니콜라이를 진찰한 다음 부항을 써서 피를 뽑아야 한다고 단언했다.
노인은 니콜라이의 몸에 부항을 붙였다. 늙은 양복공과 키리야크, 계집애들이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니콜라이의 몸에서 병이 쫓겨가는 모습이 선히 보이는 것 같았다. 니콜라이 역시 기분이 좋아 싱글벙글 웃었다. 자기 가슴에 붙인 부항이 점점 붉은 피로 가득 차는 것을 보면서 정말 그 동안 자기를 괴롭혔던 병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정말 그럴싸한데!" 늙은 양복공이 말했다. "이제 진짜 효험을 보면 좋겠구먼!"
읍내에서 온 노인은 먼저 부항을 열 두 개 붙인 다음 다시 열 두 개를 더 붙였다. 그리고는 차를 실컷 마시고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뒤 니콜라이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얼굴이 갑자기 핼쓱해졌다. 아낙네들 말을 빌리자면 얼굴이 마치 주먹만하게 오그라들었고, 손가락은 피가 빠진 탓에 검푸른 색으로 변했다. 그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양털 외투까지 몸에 둘렀지만 오한이 점점 더 심해졌다.
밤이 되자 니콜라이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마루 위로 내려 달라는 둥, 양복공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아달라는 둥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더니 이윽고 조용해졌다. 니콜라이는 아침이 채 되기도 전에 죽어 버렸다.
농사꾼 - 13. 죽음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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