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장 교구의 중심인 교회는 이 마을에서 12베르스따쯤 떨어진 고스고로바에 있었다. 농사꾼들은 아주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즉 세례를 받거나 결혼식 또는 장례식이 있을 때에만 그곳으로 갔다. 보통 때 기도를 드리는 것은 강 건너 교회에서 했다. 날씨가 화창한 일요일이면 처녀들은 새 옷으로 치장을 하고 떼를 지어 미사에 참석했다.
처녀들이 저마다 빨강, 파랑, 노란색 옷을 차려 입고 초원을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분명 무척 즐거운 구경거리였다. 그러나 날씨가 나쁘면 모두들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나 헌신 기도는 대개 큰 교회에서 드렸다. 고난 주간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은 부활절 때 15 코페이카 씩 드려야 했다. 교회 사람들이 나와서 십자가를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돈을 거두어 갔다.
할배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태어나서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뭔가 초자연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정했으나,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은 여자들이나 하는 일로 여기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 종교나 또는 여러 가지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 누군가 그에게 의견을 묻기라도 하면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무성의하게 대답하곤 했다.
"아, 알 게 뭐여? 누가 그런 걸 봤어야 말이지!"
그러나 할매는 하나님을 믿었다. 무척 막연한 믿음이긴 하지만 말이다. 할매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에 관한 온갖 생각들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었다. 죄나 죽음, 또는 영혼 등의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할라치면 갑자기 가난이나 당장 처리해야 할 걱정거리들이 도중에 튀어나와 그녀의 생각을 헤집어 놓았다. 그녀는 기도문을 외우지 못했다. 그래서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성상 앞에 서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카잔의 성모님, 스모렌스크의 성모님, 세 손을 가지신 성모님이시여..."
마리아와 표쿠라 역시 십자를 긋고 해마다 근신도 하곤 했으나 그렇다고 뭔가 알고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고, 하나님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는 어른도 없었다. 무슨 계율을 지키라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근신 기간에 고기를 먹는 것만은 엄격하게 금지했다. 이것은 이 마을 어느 농가나 대개 비슷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는 자도 드물었고, 아는 자도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성경을 사랑하고 아꼈다. 부드럽고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을 공경했지만 사실 그건 성경 외에 다른 책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 성경을 읽고 설명해줄만한 사람도 없었다. 다만 오리가가 이따금 복음서를 읽어줄 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존경했다. 사람들은 그녀와 사샤를 부를 때 '당신'이라는 경칭을 썼다.
오리가는 자주 교회당의 미사에 참석하러 나갔다. 또 이웃집에도 기도하러 가고, 근처에 있는 두 곳의 수도원과, 교회가 27개나 있는 군청 소재지로도 자주 찾아갔다. 이렇게 순례하며 다니는 동안에는 믿음에 전념할 수 있었다. 가족에 대한 근심 걱정 따위를 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집에 돌아올 때가 되면 자기에게 남편과 딸이 있다는 것을 즐겁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얼굴에 생글거리는 미소를 가득 띠고 활짝 갠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신 거예요!"
그녀가 보기에 마을 사람들의 행동에는 못마땅한 점이 무척 많았다.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늘 괴롭혔다. 마을 사람들은 이리야 성자의 기념일이나 성모 승천제, 성십자가 절기 등을 가리지 않고 술을 마셨다. 지난 번 성모제 때에는 주코버 마을에서 교구제가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농사꾼들은 사흘 동안 계속해서 술을 퍼마셨다. 공동 기금으로 마련한 돈을 50 루블이나 술값으로 축내고도 모자라 집집마다 술값을 더 걷어야 했다.
치키리제프 네 집 역시 교구제 첫날 양을 한 마리 잡아서 하루 세 끼를 그 고기만 먹었다. 모두들 옆구리가 터질 정도로 꾸역꾸역 먹고도 아이들은 밤참으로 좀더 먹으려고 자다 말고 일어나는 형편이었다.
키리야크는 사흘 동안 계속 취해 있었다. 그는 그나마 가지고 있던 모자나 장화 따위를 모조리 술로 바꿔 마셔버린 다음에는 마리아를 개 패듯 후려갈겼다. 마리아는 너무 얻어맞아 기절해서 나중에는 물을 끼얹어 깨워야 했다. 그렇게 난리 법석을 피운 다음에는 모두들 서로 쳐다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우울해져야 했다.
이런 주코버 마을 또는 종살이 마을로 불리는 이곳에서도 단 한 번 진지한 종교 의식이 올려진 적이 있었다. 그것은 8월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읍내 전체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어주는 성모상을 메고 돌아다녔다. 주코버 마을에서 그 성모상을 맞이하려고 기다리던 날은 하늘이 찌뿌등한, 찌는 듯 더운 날이었다.
처녀들은 새벽부터 단 한 벌뿐인 나들이옷을 차려 입고 성모상을 맞이하러 나섰다. 그리고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성모상을 맞아들여 십자가를 모시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마을로 들어왔다. 그러자 강 건너편 교회에서 종이 연거푸 세 번 울렸다.
마을 사람들과 다른 마을 사람들... 길이 가득 메워졌다. 시끄러운 소리와 먼지, 북적거리는 사람들... 할매도 할배도 키리야크도... 모두 성모상에 두 손을 뻗고 뜨거운 기도를 가슴에 담고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축원했다.
"우리들을 지켜주시는 성모님! 아, 성모님!"
농사꾼 - 12. 성모님! 아, 성모님!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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