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은 다 물러가고 새로 잡히는 갑자년 정월 초이튿날―
이전 같으면 비록 정월이라 할지라도 몇 사람의 종친이나 술 친구밖에 찾는 사람도 없던 흥선의 집이로되, 이제는 섭정 태공의 거궁으로서 초하룻날 이른 아침부터 이튿날 저녁인 이 때까지, 문안 오는 무리가 뒤를 따라 이르렀다.
그것을 대충 치르고, 흥선은 내실로 들어갔다.
흥선이 내로 들어설 때에, 마침 웬 처녀가 하나 와 있다가 황급히 발치로 물러 앉았다.
흥선은 아랫목에 자리를 잡으면서 처녀를 바라보았다. 낯 익은 처녀였다.
“저 애가 누구더라.”
부대 부인이 거기 대하여 대답하려 할 때에, 흥선은 자기의 기억 가운데서 그 처녀의 정체를 찾아 내었다.
“오오, 민 생원 댁 처자로구나! 그렇지?”
“네.”
부대 부인과 처녀가 동시에 대답하였다.
처녀는 민치록의 딸―얽은 소녀였다.
“음, 너 몇 살이더라?”
“새해에 열 네 살이 잡힙니다.”
“천애의 고아―적적하지 않느냐?”
소녀는 적적한 미소를 얼굴에 띄었다.
“어떠냐? 너의 오빠(양오라비 민승호―부대 부인의 동생)와의 사이의 의는 좋으냐?”
“네, 퍽 귀여워해 주십니다.”
“그러려니!”
흥선은 잠시 말을 끊고, 이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영특한 소녀의 눈찌―비록 한두 점의 얽은 자리는 있으나, 얌전하고 슬기롭고 영리한 얼굴이었다.
“글도 배우느냐?”
“네, 오빠한테 소학도 다 떼고…”
“그리고?”
“이즈음 '좌씨전(左氏傳)'을 조금씩 읽습니다.”
“좌전을 읽는다? 그래 알아보겠더냐?”
“모를 것이 너무 많아서, 오빠께 꾸중을 늘 듣습니다.”
흥선은 담뱃대를 끌어다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한 모금 뻐근하니 빨고, 그 푸른 연기와 얼굴 앞에 어리는 가운데로 흥선의 말이 새어 나왔다.
“계집이란 첫째도 둘째도 세째도 온순해야 하느니라. 승호를 양오빠로 여기지 말고 친동기로 섬겨라. 천애의 고아 승호―한 사람밖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지 않으냐? 어 참, 계집으로 태어난 이 아깝군!”
부대 부인이 흥선의 말에 응하였다.
“집안을 얘기 통 혼자 도맡아 살핀답니다그려. 아직 다른 집 계집애 같으면 각시놀이나 하고 있을 나이에…”
“영특하게 생겼소.”
“기박하고 가련한 팔자를 타고났지. 양가로는 친척도 있지만 친편으로는 제일 가깝대야 육촌 칠촌이지, 가까운 일가도 없이 불쌍한 아이외다.”
“응, 자주 오빠와 함께 집에 놀러 오너라.”
그러나 입으로는 이런 말을 하나, 흥선은 속으로는 이 소녀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까운 일가도 없다. 참 가엾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