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교마다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늙은 대신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구슬같이 흘렀다. 이 지당하고 지당한 하교에 무엇이라 올릴 말씀이 없었다. 복종과 존경의 표시 이외에는, 나타낼 다른 말씀이 없었다.
간관(諫官) 몇 사람은 진언하지 않은 죄로 혹은 찬배, 혹은 삭관(削官)을 당하였다. 그리고 시시로 민정을 진언하라는 엄명이 내렸다.
어진 상감이었다. 일찍이 민간에서 장성하기 때문에 민간의 온갖 고초도 통촉하는 상감이었다. 그 위에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잘 거느릴지도 짐작하는 상감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어질고 또한 그 전신이 초라하기 때문에, 권문들의 승세에 압도되어 먹은 마음을 발표할 기회가 없었다. 다만 권문들을 보면 어릿어릿하며 빨리 무사히 피하기만 도모하느라고 다른 겨를이 없었다.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은 무론 모두가 대비의 정치였지 상감의 정치가 아니었으며, 상감이 친정한 뒤에도 대비 재세할 동안은 일일이 대비께 여쭌 뒤에야 정사를 행하였으니 그 역시 김 대비의 정치였으며, 김 대비 하세한 뒤에 있은 몇 가지의 정치가 즉 상감의 정치인데, 그것은 모두 노신 정원용을 통하여 행한 것이다.
그 밖에 다른 재상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문제는 모두 시시하고 너절한 '수속'에 지나지 못하는 문제이며―그것도 그 위에 자기네가 해결까지 죄 지어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지, 문제가 정치에 및는 일이 없었다.
그런지라, 후일에 가객(歌客)이 철종 재위 십 사 년 간의 태평상을 노래하고 가로되,
錦繡江山春似海(금수강산춘사해) 금수강산엔 봄빛이 광대한 바다 같고
鶯花巷陌日中天(앵화항맥일중천) 꾀꼬리와 꽃 거리엔 해가 중천에 떴네
이라 한 것은, 그 십 사 년의 태평상을 노래하였다기보다도, 오히려 아무 정치도 없이 무사히 지나간 양을 비웃었다는 편이 옳을는지도 알 수 없다.
능(陵)을 고치며, 능에 행행을 하며, 옛날 유신(儒臣)에게 증직을 하며, 순조, 순조비, 헌종 등 선왕이며 대비께 존호를 추상(追上)하며, 혹은 조례(朝禮)를 받고, 혹은 사를 내리며, 연하여 옥새를 찍는 뿐―그 이상 특별한 정치라 하는 것이 얼마 없었다.
하문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알고 시은 일도 많았고, 고치고 싶은 제도며 법률도 많았지만, 너무도 어질고 내기(內氣)하기 때문에 모두 은밀히 생각한 뿐, 그 의사를 발표하여 보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그 발표하지 못하는 모는 정책을 그냥 삭여 버리기 위하여, 자연히 음일에 흘렀다. 하릴없는 대궐 안에서 적적함을 풀기 위하여는 그리로밖에는 호를 길이 없었다.
후일에 사가(史家)가 이 임금을 가리켜 용주(庸主)라 한 것은, 결과에 있어서는 그렇게 비평을 할 밖에 없었겠지만, 본질에 있어서 그 이가 그렇듯 용주이던 것이 아니고, 환경이 그 이로 하여금 그렇듯 어릿어릿하게 한 것이었다.
본시 미천한 가운데서 생장하고, 보위에 오른 것도 유년 시대가 아니요 열 아홉이라는 장년 시대인지라,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당신의 과거 때문에, 당시의 제상(유년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명문 공자로서 장성한)들에게 자연히 마음에 있는 대로 처분을 못 내린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 어질고 내기한 상감을 두고, 권문 거족들은 마음대로 자기네의 길을 걸었다. 세상이 자기네뿐을 위하여 생겨난 듯이 아무 기탄 거리낌이 없이―간관들도 이 임금께 진언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었다, 진언을 한달사, 임금에게는 당신의 마음에 있는 처단이 그대로 내리지 못할 것을 간관들도 잘 알고 있으므로―그리고 섣불리 하다가는 척신 거족들에게 미움을 사서 큰코를 다칠는지도 알 수 없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