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체 만강하옵신지 아옵고자 신 정원용이 대령하왔습니다.”
고희(古稀)를 지난 지 이미 구 년, 여든이라는 나이를 눈앞에 보는 늙은 대신 정원용이, 대조전 마루에 끓어 엎디어 문안을 드릴 때에, 상감은 지밀(至密)에서 방금 아침 수라를 끝내고 대조전에 납신 때였다.
등극한 이래, 재상 가운데 상감이 믿고 힘입고 마음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정원용 한 사람뿐이었다.
강화에서 농사를 짓고 세를 베는 한 개의 초동으로 지내다가, 갑자기 입궐하여 보위에 오른 상감은, 사면 모두 어마어마하고 서투르고 무서운 가운데에서, 처음에는 김 대비 한 분을 믿고 지냈다.
다른 재상 대신들은 모두 상감께는 무섭고 위엄성 있게만 보였다. 대신들이 당신 앞에 꿇어 엎디어 말씀 아뢸 때는 거북하기만 하였다.
그 가운데서 김 대비 이외에 다만 한 사람 백발 재상 정원용뿐은 상감도 친애함을 느꼈다. 귀인답게 굵은 주름살이 박히고, 그 위에 허연 머리와 허연 수염으로 장식된 정원용의 얼굴은 역대 사조의 임금을 섬기는 동안, 저절로 임금께 대해서는 무조건하고 복종하겠다는 온화한 표정이 새겨져 있었다.
이 온화한 얼굴의 재상은 위엄과 위의로써 장식한 다른 재상들과 달라서, 겁먹은 상감과 친애의 염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군신의 사이라기보다도―상하의 사이라기보다도―오히려 부자의 사이에 당연히 가져지는 친애와 존경의 염을, 정원용에게 대하여 품고 있는 것이었다.
정종―순조―헌종―이렇게 삼 대의 임금을 섬기고 또한 사 대째의 임금을 모시러 강화로 왔을 때, 처음 대한 이 노재상은, 상감 재위 십 수 년 간을 통하여 인종과 굴복과 존경의 한결같은 태도로써 새 임금을 섬겼다.
그런지라, 명리와 욕아 때문에 섬기는 다른 재상들과 달라서, 상감은 정원용에게뿐은 어버이로 섬기고 싶은 친애감조차 느끼는 것이었다.
다른 재상들이 무슨 말씀을 아뢸 때에는, 상감은 늘 황황하여서 당신의 몸조차 마음대로 가지지를 못하였다. 무슨 마음에 먹었던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유유낙낙 그들의 아룀에 혹은 옥새를 찍고 혹은 승낙을 하고 하였다.
그 일이 지난 때마다 당신으로서도 그 때 왜 이렇게 처단하지 않았는가 하는 후회를 하고 하였지만, 재상들과 당면하기만 하면 다음에 먹었던 생각은 모두 잊고 유유낙낙할 뿐이었다. 더구나 김 대비의 친척이자 또한 당신의 인척(姻戚)이 되는 김씨 일문에 대해서는 더욱 황황한 태도를 취하고, '강화 도령'이라는 멸시를 받지 않으려고 거기 마음을 쓰노라고, 마음에 없는, 뜻에 안 맞는 일을 웃음을 보이고 하였다.
그러나, 정원용에게뿐은 그렇지 않았다. 본시 어질기 때문에 백성에게 대하여 가진 착한 정책을 정원용에게 뿐은 의견을 물으며 가졌던 의향을 그대로 말하고 하였다.
역대의 네 임금을 섬기는 원용은, 또한 임금을 섬길 줄을 알았다. 본시부터 대궐 안에서 귀공자로 자란 분이 아니고, 비천한 가운데서 그 십 구 년 전생을 보낸 상감이, 갑자기 대궐에 들어와서 얼마나 서먹서먹할지, 그 점도 짐작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원용이 상감을 섬기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긴다는 것보다, 오히려 늙은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훈도하듯 하였다. 그리고, 그러기 때문에 상감은 더욱 이 늙은 재상을 믿고 힘입고 하였다. 말하자면 상감은 정원용을 신으로 보지 않고 스승으로 섬긴 것이다.
“근래 언관(言官)들이 민사를 진언하지 않음은 웬일이옵니까?”
많은 대신 가운데 다만 한 사람 신임하는 재상을 지척에 부르고, 상감은 마음에 먹었던 말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