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용이 황송히 허연 머리를 마룻바닥에 조았다.
“황공하온 하교이옵니다. 언관은 어전에 진언하는 것이 그 직책이오매 어찌 추호라도 게으르오리까?”
이 때에 상감은 수일 전의 사건을 분명히 머리에 그려보았다.
수일 전에 부호군(副護軍) 신태운(申泰運)이 '근일 민간에 소위 왜역수본(倭譯手本)이라는 것이 돌아서 혹세무민을 하는데, 그 장본인을 잡아서 엄벌하면 좋겠다'는 상소를 한 일이 있었다.
신태운은 간관(諫官)이 아니었다. 언책을 가지지 않은 한 개의 무변(武弁)도 나라를 위하여 이런 상소를 하거늘, 소위 간관들은 일체 그런 일은 모른 체하고 오로지 국록을 도식하기에만 급급한 것이 매우 불쾌하였다.
“아니외다. 내가 우매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근일같이 언로가 막혀 본 일이 종전에는 없었습니다. 나는 비록 어보를 몸소 잡았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촌부에 지나지 못하는 사람 ― 여러 대신 재상들의 끊임없는 보좌가 있어야지 않겠소이까? 그런데…”
상감은 말을 끊었다. 좀 과한 말이 하마터면 나올 뻔한 것이었다. 대각(臺閣)에서 일체 진언이 없음은, 아 나, 국왕을 무시함이 아니냐―이렇게 상감은 하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역대 사조의 임금을 섬겨서, 임금의 마음을 촌탁하기에 밝은 원용은 상감의 하려던 말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한참을 묵묵히 있다가,
“전하, 수대(首臺─大司諫) 임백수(任百秀)를 찬배(竄配)하도록 처분이 계시옵기를 바라옵니다.”
하고 아뢰었다.
이러한 마음의 불평을 막연하게나마 발표할 수 있는 재상은 정원용 한 사람뿐이었다. 영의정 김좌근을 비롯하여 상공 육경, 누구든 상감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다. 오로지 자기네의 생각을 가지고 와서 이렇다 저렇다 상감을 귀찮게 하는 뿐, 상감을 위하여 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에 상감은 이 높고 귀한 보위조차 불편하였다. 지나간 철 없는 시절―마음대로 자유로이 벌판을 뛰어 다니며,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로이 하던 '강화 도령'의 시절이 한없이 그리웠다.
지금, 한 번 옥체를 일으키면 내관들이 달려와서 부액(扶腋)을 한다. 한 말씀 구중에서 내면 여관들이 처분 내리기가 무섭게 거행을 한다. 그러나 얼마나 부자유롭고 답답한 생활이냐? 하고 싶은 일을 여기 기이고 저기 기이기 때문에 하나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지금의 처지는 이것이 과연 행복된 처지일까?
몸은 지존의 위에 있어서 백성들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임금'이라 하나, 상감은 즉위한 이래로 아직 백성들의 소식을 들은 일이 없었다. 이전 '강화 도령'시대에 겪은 바와 같이 지금도 백성들은 탐관오리의 아래서 도탄에 괴로움을 맛볼 것이로되, 당신의 귀에는 아직 그런 소문이 들어와 본 적이 없었다. 맞은편 늙은 재상을 굽어 보고 있는 동안, 용안에는 차차 적적한 표정이 흘렀다. 구중에서는 약한 탄식성까지 새어 나왔다.
“그것뿐이 아니라, 이즈음 보자면 각 지방의 수령의 천전(遷轉)이 빈번하고 내왕이 분분하니, 그것은 또한 웬일이오니까?”
노신 정원용에게 대한 두 번째의 하문이었다.
“아무리 공사 삼일이라는 속담이 있기로, 이즈음은 너무 심한가 봅디다. 지방 수령은 그 곳에 오래 머물러서, 그 땅 지리 인정 풍속을 다 안 뒤에야 비로소 선정을 베풀 수가 있는데, 이즈음같이 천전이 빈번하면 백성은 다만 맞고 보내기에만 바쁠 것이 아니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