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은 양반이라 하나 거지 이상의 가난한 살림을 하는 이 민치록의 집안의 괴롭고 구슬픈 가사를 혼자 돌보는 소녀는 일가 언니의 위로에 그의 총명하게 생긴 눈을 쳐들었다. 이 꽤 커다랗고 맑은 눈―이 눈이야말로 후일 이 소녀가 변하여 고종 왕비가 된 뒤에 한 번 그느스럼히 뜨면 청국, 아라사, 모든 쟁쟁한 외교관들이 그 앞에서 개짐승의 시늉이라도 달갑게 하였고, 한 번 크게 뜰 때는 서슬이 푸르르던 국태공 흥선대원군의 세력도 능히 부셔 버린 놀라운 눈이었다. 얼굴은 얽었으나마, 몸은 야위고 초라하나마, 이 소녀의 가슴 깊은 곳에는 놀라운 혼이 생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여기서 일가의 어른으로서 이 소녀를 따뜻이 위로를 하는 흥선 부인도, 후에는 이 소녀의 앞에 머리를 수그리고 애원할 날이 오리라고는, 소녀도 부인도 짐작할 바이 없었다.
“자, 들어가자. 어서 아버님께 뵈자. 나도 가난한 살림을 하는 사람이라 긴 시간이 없다.”
“아버님도 늘 이즈음 외로와하시니깐 언니께서 오신 걸 얼마나 반가와하실지…”
이리하여 중로의 마나님과 소녀는 서로 손목을 마주잡고 병석에 누워 있는 주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저씨도 그걸 무슨 말씀이라고 하시우?”
“아니, 내 탈은 내가 제일 잘 아는 것―다시 일어나지 못할 탈이외다.”
초라한 방 안, 병들어 누워 있는 민치록의 곁에 흥선 부인은 병인을 위로하고 있었다.
“아직 장년에 그만 탈을 가지고 다시 일어나시느니 못나시느니 너무도 약한 말씀이외다.”
“아니, 이 긴 병은 한 번 걸리기만 하면 다시 살지 못하는 것이외다. 낙척 십 년, 다시 세상의 밝은 빛을 보지 못하고 쓰러질 모양이외다. 아무 세상 물정을 모르는―이…”
치록은 손을 들었다. 그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떨리는 손을 들어서 발치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딸을 가리켰다.
“아직 젖비린내도 떨어지지 않은 저 애를 남겨 두고 이런 병에 걸리니 딱하기가 짝이 없소.”
여윈 치록의 가슴이 이불 아래서 들먹거렸다. 베개 위에 놓인 머리가 뒤따라 움직였다.
“훌!”
맥 없는 기침 한 마디―그 뒤를 따라서 또 한 마디―연하여 기침이 났다. 그 기침을 한참 하고 난 치록은 말을 계속하였다.
“하늘은 우리 일족에게 왜 이렇듯 야속하신지? 돈 없고 낙척한 우리네―내가 덜컥 죽는 날이면, 저 철 없는 계집애는 누구를 믿고 살겠소?”
쑥 들어간 눈에서는 눈물이 한 줄기 그의 여윈 뺨으로 흘렀다. 흥선 부인도 탄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