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들게. 입에 안 댔으면 모르거니와, 사내 대장부가 그만 술이야 사양해 쓰겠나.”

독촉이 성화같다. 기천은 벌써 말이 어눌해지도록 취했다.

“온 이건 너무 벅차서…”

하고 동혁은 '이런 때 누가 오지나 않나' 하고 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데, 마침 밖에서 잔기침 소리가 나더니,

“나리께 여쭙니다. 큰덕미 선인(船人)이 들어왔는뎁쇼. 내일 아침에 볏짐을 내시느냐구 합니다.”

하는 것은 머슴의 목소리다. 기천은,

“뭐, 뱃놈이 들어왔어?”

하더니

“자 잠깐만 기다리게.”

하고 툇마루로 나간다. 그 틈에 주전자 뚜껑은 또 소리 없이 열렸다. 기천이가 벼를 실릴 분별을 하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동혁은,

“어이구, 벌써 가슴이 다 두근두근하는군요.”

하고 가슴에다 손을 대며 금방 술을 마시고 난 것처럼 알콜 기운을 내뿜는 듯이 후우 하면서 술잔을 주인의 앞에다 놓았다.

남포에 불을 켜는데 밥상이 나왔다. 반주가 또 한 주전자나 묵직하게 나오고 어느 틈에 닭을 다 볶아서 주인과 겸상을 하였다. 기천이가 상놈하고 겸상을 해보기는 생후 처음이리라.

'아무리 요새 세상이기루 볼 건 봐야지. 우리네 하구야 원판 씨가 다르니까…'

하고 남의 집 잔치 같은 데를 가서도 자리를 골라 앉는 사람으로는 크게 용단을 내었고 실로 융숭한 대접이다. 동혁은,

'놈이 발이 제려서…'

하면서,

“전 저녁을 먹고 왔지만, 세잔갱작(洗盞更酌)이라는 데 자 이번엔 반주루 한 잔 더 드시지요.”

하고 이번에는 공기에다 가득히 따라서 권하니까,

“이거 자네 협잡을 했네 그려. 그저 끄떡없는 게 수상쩍은걸.”

하면서도 기천은 인음증(引飮症)이 대단한 사람이라, 이제는 술이 술을 끌어들여서, 동혁이가 받아든 술을 제 눈앞에서 한 방울도 안 남기고 주전자에다가 붓는 것을 멀거니 보면서도,

“과한걸 과해.”

해 가며 연거푸 마신다. 그만하면 온 세상이 다 내 것처럼 보일 만큼이나 거나해졌다.

“참 이렇게 술에 고기에 주셔서 잘 먹습니다만, 특청 하나 할 게 있어서 왔는데, 들어 주시겠에요.”

그제야 동혁은 취한 체하면서 본론을 끄집어 냈다.

기천은 몽롱한 눈을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뜨고 상대자를 보더니 다 붙은 고개를 내밀며 귓속말이나 들으려는 듯이,

“무슨 특청? 왜 아쉰 일이 있나?”

하고 귀를 갖다가 댄다. 특청이라면 으레 돈을 취해 달라는 줄 알고, 취중에도 '너도 기어이 나한테 아쉰 소리를 할 때가 왔구나' 하는 듯이 연거푸,

“왜 돈이 소용이 되나?”

하고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며 은근히 묻는다.

“돈이 소용이 되는 게 아니라 빚을 갚으러 왔에요.”

“응? 빚을 갚으러 오다니? 자네가 언제 내 돈을 썼던가?”

“전 댁에 돈을 다 갚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위임을 맡아 가지고 왔는데요.”

“다른 사람들이라니, 누구 누구 말인가?”

“이번에 주인어른께서 새로 회장이 되신 우리 농우회의 회원들이 진 빚인데요. 저희들은 와 뵙고 말씀드리기가 어렵다고 제게 다 맡겨서 심부름을 온 셈입니다.”

“허, 자네도 호사객일쎄그려. 더러들 썼지만 몇 푼 된다구. 하도 오래 돼서 나두 잊어버렸는걸.”

하면서도 기천은 '너희들이 무슨 돈이 생겨서 한꺼번에 갚는다느냐'는 듯이 고개를 까땍까땍하면서 따개질을 하듯이 동혁의 눈치를 살핀다.

“수고스러우시지만 뭐 적어 두신 게 있을 테니 좀 꺼내 보셨으면 좋겠는데요.”

그 말을 듣자 기천은 딴전을 부리듯,

“여보게, 우리 그런 얘긴 뒀다 하세. 술이 취해서 지금 옹숭망숭한데.”

하고, 고리대금업자는 살금살금 꽁무니를 뺀다. 동혁은 버쩍 다가앉으며,

“아니올씨다. 일이 좀 급한데요. 참 술김에 비밀히 여쭙는 말씀이지만 주인어른께서 우리 회의 회장이 되신데 대해서 불평을 품는 젊은 사람들이 있는 줄은 짐작하시겠지요? 그 중에 몇몇은 혈기가 대단해서 제 손으로는 꺾을 수가 없는데 이번에 좀 후하게 인심을 써 주셔야 과격한 행동까지 하려고 벼르는 청년들을 어떻게 주물러 볼 수가 있겠어요.

사세가 매우 급하길래 이렇게 찾아 뵙고 무사히 타협을 하시도록 하는 게니, 나중에 후회가 없으시도록 하시는 게 상책일 것 같아요. 점잖으신 처지에 혹시 길거리에서라도 젊은 사람들한테 단단히 창피를 당하시면 거 모양이 됐습니까?”

하고 타이르듯 하니까, 기천은,

“아아니 자네가 날 위협을 하는 셈인가?”

빨끈하고 성을 낸다. 동혁은 정색을 하며,

“온 천만에, 위협이라뇨. 그렇게 오해를 하신다면 무슨 일이 생기든 저버텀 발을 뺄 테니 맘대로 해 보세요.”

하고 정말 슬그머니 을러메었다. 기천은 상을 물리고 담배를 붙여 물었다. 숨이 가쁜 듯 벽에 가 기대어 쌔근쌔근하며 한참이나 대물뿌리만 잘강잘강 씹다가,

“그야 웃음의 말일쎄만 내 귀에도 이런 말 저런 말 들리네. 저희들이 날 어쩌기야 하겠나만, 아닌게 아니라 모두 마구 뚫은 창구멍 같아서 걱정일세. 나 없는 새 회관 문짝을 걷어차서 떼어놨다니 온 그런 무지막지한 놈들이 있나. 하나 자네 같은 체면도 알구 지각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좋도록 무마를 시켜줄 줄 믿네.”

하고 금세 한풀이 꺾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