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혁이가,

“계씨도 서울 가셨다지요? 풍편에 놀라운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래 얼마나 상심이 되세요?”

하고 화평한 낯빛으로 동정해 주니까,

“허어, 거 온 창피스러워서…속상하는 말이야 다 해 뭘하겠나. 그야말로 아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셈이지.”

하고 매우 아량이 있는 체를 한다. 동혁은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먼저 기를 누르려고,

“참 이번 저 없는 동안에, 귀찮은 일을 맡으시게 됐더군요.”

하고 아픈 구석을 꾹 찔러 보았다. 기천은 의외로 동혁의 말씨가 부드러운데 안심이 되는 듯,

“하 이 사람, 자네가 먼저 말을 꺼내네 그려. 난 백죄 꿈도 안 꾼 일을, 건배랑 몇몇이 누차 찾아와서 벼락감투를 씌우데 그려. 자네네 일까지 덧붙이기로 해 달라니, 젊은 사람들이 떠맡기는걸 이제 와서 마다는 수도 없구…그래서 자네하고 얘기를 좀 하려고 만나려던 찬데, 참 마침 잘왔네.”

하고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 듯이 뾰족한 발끝을 달달달 까분다.

“그야 인망으로 되는 일이니까요. 진작 일을 봐 줍시사구 여쭙질 못한 게 저희들의 불찰이지요.”

그 말에 기천은 발딱 몸을 일으키며,

“가만있게. 우리 오늘 같은 날이야 한잔 따뜻이 마시면서 얘기를 하세.”

하고 요리집에서 하던 버릇인지, 안으로 대고 손뼉을 딱딱 친다.

전일과 똑같은 대중의 술상이 나왔다. 그러나 오늘은 어란과 육포 조각까지 곁들여 내온 것을 보니, 특별 대우를 하는 모양이다.

“여보게, 오늘은 한잔 들게. 사람이 고집이 너무 세도 못 쓰느니.”


하고 권하는 대로,

“그럼, 나 먹는 대로 잡수실 테지요?”

하고 동혁은 커다란 주발 뚜껑으로 밥풀이 둥둥 뜬 노오란 전국을 주루루 따랐다.

“자 먼저 한잔 드시지요.”

“어 이 사람, 공복인데 취하면 어떡허나. 요새 연일 과음을 해서…”

하면서도 기천은 동혁이가 먹는다는 바람에 숨도 안 쉬고 쭉 들이켰다. 이번은 동혁이가 불가불 마셔야 할 차례다. 동혁은,

“이거 정말 파계를 하는군요.”

하고 주발 뚜껑이 찰찰 넘치도록 받아 놓았다. 동혁은 본디 주량이 없는 것이 아니다. 고등 농림의 축구부의 주장으로 시합에 우승하던 때에는 응원 대장이 권하는 대로 정종을 두 되 가량이나 냉수 마시듯 하고도 끄떡도 안하던 사람이다.

“어서 들게.”

“네, 천천히 들지요.”

그러나 이만 일로 여러 회원과 오늘날까지 굳게 지켜오던 약속을 깨뜨릴 수도 없고, 그 잔을 내지 않을 수도 없어서 어름어름하고 안주만 집는 체하는데, 안에서 계집애가 나오더니,

“아씨가 잠깐 들어옵시래유.”

한다. 기천은,

“왜?”

하고 일어서며,

“아 이 사람, 어서 들게.”

하고 마시는 것을 감시하려고 한다. 동혁은 술잔을 들었다. 돌아앉으며 단숨에 벌떡벌떡 들이키는 것을 보고야 기천은,

“허어 어지간하군.”

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저녁상을 내보낼까 물어보려고 불러들이는 눈치다. 동혁은 씽긋 웃으며 술잔을 입에서 떼는데 술은 고대로 있다. 능청스럽게 소매로 입을 가리고 들이마시는 시늉만 내어보인 것이다. 그 술을 얼른 주전자에다 도로 따르고, 이번에도 안주를 드는 체하고 있는데 기천은 벌써 얼굴에 술기운이 돌아가지고 나온다. 동혁은,

“무슨 술이 이렇게 독합니까? 벌써 창자 속까지 찌르르한데요.”

하고 진저리를 치는 흉내를 낸다.

“기고(忌故)도 계시고 해서, 가양(家釀)으로 조금 빚어논 모양인데 품주(品酒)는 못 돼두 그저 먹을만허이.”

“이번엔 주인어른께서 드셔야지요.”

“온, 이거 과한걸.”

“못 먹는 저두 먹었는데요. 참 제가 술 먹은걸 회원들이 알아선 안됩니다.”

“그야 염려 말게. 내가 밀주해 먹는 소문이나 내지 말게. 겁날 건 없네만…”

하고 기천은,

“핫하하하”

하고 간드러지게 웃으며 잔을 들더니 엄지손가락을 제친다.

“이왕이면 곱배기루 한 잔 더하시지요. 저두 따라 먹을 테니.”

동혁은 석 잔째 가득히 따라 올렸다.

“아아니, 자네 사람을 잡으려나? 이렇게 폭배를 하곤 견디는 수가 있어야지.”

하면서도 '어디 누가 못 배기나 보자'는 듯이 상을 찌푸리고 꼴딱꼴딱 마셔 넘긴다. 동혁은 기천의 목줄띠에 내민 뼈끝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이번엔 어떡하나' 하면서도 그 술잔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